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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0.05 ‘펠릭스 로드리게스’와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인연
- 2007.10.05 [이강철 선수 특집 1 : 누구?] - '06. 4. 12
- 2007.10.05 [이강철 선수 특집 2 : 라이벌] - '06. 4. 12
■ 박찬호
1989년 LA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고 1990년 루키 리그에서 타자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펠릭스 로드리게스(이하 F-ROD)는 1993년 싱글A 소속일 때 투수로 전향을 한다. 그리고 다음해 그는 더블A 샌안토니오로 승격을 하게 되고, 여기에서 F-ROD와 박찬호의 인연은 시작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박찬호는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6년간 계약금 120만 달러와 연봉 10만 9천달러의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사상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을 했다. 하지만 2경기만에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한 채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었고 그 팀이 바로 F-ROD가 있던 더블 A 샌안토니오였다. 그리고 F-ROD와 박찬호는 그해 각각 26, 20경기에 모두 선발로 나서며 미래의 메이저리거를 향해 팀 동료로서 선의의 경쟁을 시작하게 된다.
이어 1995년 두 선수는 나란히 트리플 A 앨버커키로 동반 승격을 하게 되고, 얄궂게도 여기에서 둘의 운명은 갈라진다. 모두 팀의 선발투수로 나란히 시즌을 시작한 가운데 5월 중순경 F-ROD가 먼저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5월 13일 F-ROD는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꿈에도 그리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게 되고 이후 영광스러운 메이저리그 첫 승까지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진가를 보여주기에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못했고, 더군다나 그가 꿈꿨던 선발 자리는 없었다. 이미 LA 다저스의 선발진은 에이스 라몬 마르티네즈(17승 7패), 토네이토 열풍의 노모 히데오(13승 6패), 이스마일 발데스(13승 11패), 톰 캔디오티, 페드로 아스타시오 등으로 굳건한 5선발 체제가 구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는 앨버커키로 다시 되돌아와야만 했다.
F-ROD가 불규칙한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 박찬호는 여전히 트리플 A에서 꾸준히 선발 수업을 쌓고 있었고, 마침내 시즌 막판 엔트리가 확장되는 기간을 이용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된다. 그리고 2경기를 뛰게 되고, 그중 한경기는 LA 다저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 선발 투수 등판이었다. 이는 그의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임과 동시에 F-ROD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선발 등판이기도 했다.
그리고 1996년 둘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F-ROD는 이번에도 트리플 A 앨버커키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된 반면, 박찬호는 LA 다저스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당당히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이스 라몬 마르티네즈가 갑작스런 부상으로 물러난 경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메이저리그 첫 승을 기록한 박찬호는 이후 확실한 메이저리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반면, F-ROD는 이해 단 한 번도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성적은 더욱 나빠졌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웨이버 공시가 된 후 신시내티 레즈로 유니폼을 갈아입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 최희섭
펠릭스 로드리게스(이하 F-ROD)는 이제 팀 동료가 될 최희섭과도 묘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너무나 흥미롭다.
둘의 인연은 투수와 타자라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줬다. 그리고 그 첫 만남은 지난 2003년 4월 30일(이하 한국시간) 당시 퍼시픽 벨 파크에서 있었다. 그 때 소속은 F-ROD가 샌프란시스코였고 최희섭은 시카고 컵스였다. 8회초 선두 타자로 에릭 캐로스를 대신해서 나온 최희섭은 마침 바뀐 투수 F-ROD를 상대했다. 그리고 결과는 F-ROD의 완승. 최희섭은 방망이도 돌려보지도 못하고 6구만에 서서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F-ROD의 보직이 셋업맨이고, 최희섭도 플래툰 시스템으로 인해서 둘의 맞대결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이후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정말 정확하게 1년이 걸렸다.
2004년 4월 30일. 이번에도 장소는 SBC 파크(퍼시픽 벨 파크에서 개명)였다. 9회초 1사후 주자 없는 상황에서 1년전과 달리 플로리다 유니폼을 입고 최희섭이 타석에 들어섰다. 바로 앞선 4번 마이크 로웰이 3-3상황에서 F-ROD를 상대로 1점 홈런을 터뜨린 영향 때문인지, 최희섭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고 결국 이번에도 헛스윙 삼진 아웃. 하지만 최희섭은 선발 출장한 이날 경기에서 시즌 8호 2점 홈런을 쳐내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반면, 마이크 로웰에게 홈런을 허용한 F-ROD는 패전 투수의 멍에를 썼다.
F-ROD의 영입이 발표된 후 최희섭이 밝힌 것처럼, 최희섭에게 F-ROD는 “엄청나게 빠른볼을 던지는, 무시무시한 투수”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2번의 삼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둘 간의 대결에서는 최희섭이 완패를 당했지만, 당시 두 경기는 모두 최희섭의 소속 팀 승리로 끝이 났었다. 그리고 그 점수는 모두 4점이었다.
인연은 이 뿐만이 아니다. 두 선수는 같은 감독의 지도를 받은 경험이 있다. 주인공은 ‘더스티 베이커’와 ‘잭 멕키언’이다. 먼저 최희섭은 2003년 시카고 컵스 시절 팀에 새로 부임한 ‘더스티 베이커’와 인연을 맺었지만 에릭 캐로스와의 지독한 플래툰 시스템으로 인해 많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음해 플로리다 말린스로 이적하고 만다. 그리고 새로운 팀에서 최희섭은 전년도 월드시리즈 우승에 빛나는 노장 ‘잭 멕키언’ 감독을 만나게 되고, 이전보다는 좀 더 많은 기회를 보장받으며 활기찬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불과 반 시즌만에 LA 다저스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F-ROD는 1996년 시즌 후 LA 다저스에서 버림을 받고 난 뒤 신시내티에 입단하게 되는데 이때 만나게 되는 감독이 ‘잭 멕키언’이었다. 이때 F-ROD는 지금도 메이저리그 생활동안 유일한 선발 등판을 하게 되었고, LA 시절과는 달리 많은 기회를 얻으며 재기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애리조나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게 되는 그는 ‘더스티 베이커’를 만나게 되면서 전혀 새로운 투수로 태어나게 되었다. 최고 전성기를 그와 함께 보냈으며 월드 시리즈 무대도 밟게 되었다.
■ 구대성
이외에도 현재 한화 이글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대성은 지금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보다도 먼저 F-ROD와 팀 동료가 될 뻔했다. 구대성이 일본을 거쳐 미국 진출에 도전했던 2005년 뉴욕 양키즈에 입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당시 F-ROD도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가 되어 먼저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구대성의 뉴욕 양키스 소식이 나올때마다 F-ROD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구대성은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뉴욕 메츠로 행선지를 바꾸며 인연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강철 선수 특집 1 : 누구?]
작년 이맘때였다. 시즌 초반부터 불혹을 앞둔 나이에도 마당쇠처럼 매 경기 투입이 되며, “야구를 나이로 하냐”며, “앞으로 2~3년은 더 현역에서 뛸 자신이 있다”고 기염을 토하던 이강철(40) 선수가 우천으로 인해 예정보다 하루 늦은 4월 12일 두산 베어스와의 광주 홈 개막전 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지며 정들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PART I
1부 : 이강철 선수 이력과 기록 정리
2부 : 이강철 선수에 대한 키워드
3부 : 이강철 선수의 프로 생활 다시 보기
PART II
1부 : 이강철 선수, 그의 라이벌
2부 : ‘공짜’가 선정한 최고의 경기
[[[[[[[[[[[[[[[[[[[[[[<< 1부 : 이강철 선수 이력과 기록 정리 >>]]]]]]]]]]]]]]]]]]]]]]
이강철(1966년 5월 24일 광주 生), 키:180cm, 체중:79kg, 혈액형:A형
■ 이력
1982년 : 광주일고 입학
1985년 : 동국대학교 입학
1988년 : 서울올림픽 야구 대표팀
1989년 : 해태 타이거즈 입단(신인 1차 지명)
1991년 11월 : 한일 슈퍼게임 대표
1999년 11월 :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FA 3년간 8억원)
2001년 7월 :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현금 2억) - 기아 타이거즈
2003년 10월 :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 야구 대표팀
2004년 11월 : 기아 타이거즈 계약, 두 번째 FA(1년 계약), 계약금 1억 원, 연봉 2억 원
2005년 10월 : 기아 타이거즈 투수코치
2006년 4월 12일 : 정식 은퇴식(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 두산 베어스 전)
■ 개인 기록
1998년 7월 29일 10년 연속 세 자리 탈삼진(대전 한화 전)
1998년 8월 9일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달성(대구 삼성 전)
1998년 9월 17일 프로 최초 250경기 선발등판(광주 한화 전)
2002년 8월 2일 프로야구 통산 2000이닝 투구(광주 SK 전, 통산 두 번째 기록)
2004년 5월 13일 프로야구 통산 개인 최다 탈삼진(1699개) 기록 수립(광주 현대 전)
2004년 8월 13일 프로야구 통산 2번째 150승 달성 (사직 롯데 전)
■ 프로 통산 전적
○ 152승 112패 53세이브(최다승 역대 2위)
○ 602 경기 출장
○ 2204.2이닝(역대 2위)
○ 1749삼진(역대 2위)
○ 65완투(역대 4위), 18완봉승(역대 5위)
■ 개인 수상 기록
1990년 시즌 다승 3위
1992년 최다 탈삼진(155개) 투수
1992년 시즌 다승 2위, 승률 5위
1996년 한국시리즈 MVP
1997년 시즌 승률 2위
■ 기타 기록
○ 최다 1안타 완봉승(1990년 삼성 전, 1997년 한화 전, 1998년 OB 전, 역대 1위)
○ 3년 이상 200이닝 투구(1990~1992년, 역대 2위)
(참고) 5년:정민태(현대.1996~2000년)
2년:정민철(한화.1996~1997년), 주형광(롯데.1995~1996년), 리오스(두산,2004~2005년)
[[[[[[[[[[[[[[[[[[[[[[<< 2부 : 이강철 선수에 대한 키워드 >>]]]]]]]]]]]]]]]]]]]]]]
이강철 선수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야구 선수답지 않은 잘생긴 외모?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 하지만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이런 경기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그가 마운드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 이강철 선수는?
▲ 홈런공장 공장장
그는 삼진은 많이 잡아냈지만, 타자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공을 던지는 잠수함 투수라는 특성으로 인해 데뷔 초부터 각 팀 홈런 타자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다. 특히, 데뷔초에는 같은 언더 핸드 투수인 한희민 투수와 함께 누가 과연 홈런 공장장으로 등극할 지가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 기록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홈런을 허용한 타자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강철 선수와 같이 2005 시즌이 끝나고 유니폼을 벗은 김기태 선수는 1991년 이강철 선수로부터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뽑아냈다. 그는 국내 최고의 파워와 정교함을 겸비한 최고의 교타자라는 찬사를 들었던 선수였는데, 그 홈런의 영향 때문인지 1994년 좌타자로는 최초로 홈런왕에 등극하게 되었다.
또한, 국민 타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승엽 선수도 1995년 5월 경기에서 그로부터 데뷔 첫 홈런을 빼앗아 갔다. 특히 타자와 투수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이 홈런 한방은 타자로서의 자신감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 잠수함 투수의 대명사 - 원조 핵잠수함
야구팬들 사이에 ‘최고의 투수가 누구 인가?’라는 질문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소재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유명한 야구 게시판 등에서 ‘어떤 투수가 최고의 투수라더라’며 글을 올리면 최고의 조회수와 함께 바로 바로 댓글이 달리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기가 일쑤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잠수함 투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프로야구 유일한 10년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기록하며 최다승 기록에서도 152승을 기록한 이강철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은퇴식과 함께 이강철 선수와 같은 해 유니폼을 벗은 기록의 사나이 장종훈선수도 은퇴를 하면서 선수생활 중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로 주저없이 이강철 선수를 꼽았다.
▲ 성실함의 대명사
아무래도 그 의 성실함은 기록이 말해준다.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데뷔 첫 해 15승8패 5세이브를 시작으로 데뷔 후 4년 연속 15승, 10년 연속 두 자리 승수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연속 기록들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 선수도, 통산 최다승의 송진우 선수도 이루지 못한 달성하기 힘든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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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야구전문가들은 그를 보고 2인자라고 한다. 마치 정치판에서 어느 노 정치인이 자신과 손을 잡았던 모든 후보들을 대통령으로 이끌었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자 그를 ‘영원한 2인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강철 선수도 그러한가?
최고의 투수 선동렬 선수의 룸 메이트로써,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최고의 선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좋은 후배의 역할을 했던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기록적인 측면에서 지금도 최다승 기록과 투구에 관한 모든 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는 송진우(한화 이글스) 선수에 이어 최다승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때 다승과 탈삼진 부문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1, 2위를 다투었지만, 지금은 모든 부문에서 2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인자 이다 보니 상복도 따라오지 않았던 걸로 유명했다. 은퇴 할 때 마저도 그 누구에게 뒤쳐질 것 없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바람에 쓸려가 듯 조용히 은퇴가 발표되었다. 우승의 기쁨도 수없이 맛보며, 그 자신 스스로 팀의 우승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2인자로 기억되고 있다.
과연 그의 17년간의 선수 생활은 2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보자.
■ 해태 타이거즈 미래 3총사의 일원으로서 고향팀에 입단하다
그는 광주일고와 동국대학교를 거치며 가는 곳마다 팀을 우승시키는 화려한 아마추어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1988년 올림픽으로 인해, 그 어느 해보다 뛰어난 신인 선수들이 무더기로 입단한 1989년 해태 타이거즈에 주목을 받으며 입단을 했다. 특히 조계현(군산상고-연세대), 이광우(군산상고-원광대) 선수와 함께 국가대표 3인방 중 한명으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타이거즈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그는 첫해부터 36경기에서 15승(8패)에 방어율 3.23을 기록하며 137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이듬해에도 2년차 징크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16승(10패)에 방어율 3.14를 기록하며 165개의 삼진을 기록 하는 등 신인 시절보다 더욱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막강한 해태 타이거즈 선발진의 없어서는 안 될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연도 소속 게임 - 승 -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89 해태 36 - 15 - 8 - 5 - 137 - 3.23 - 195.1
1990 해태 44 - 16 -10 - 5 - 163 - 3.14 - 220.2
■ 2인자로서 묵묵히 기록을 쌓아나가다
신인 시절부터 기복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꾸준한 기록을 세우던 그였지만, 정작 크게 대접은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같이 입단한 조계현 선수도 그 못지않은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다이내믹한 투구폼과 화려한 구질로 인해 그는 많은 타이거즈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 보다 더한 큰 벽이 있었으니 ‘국보급 투수’ 선동렬 선수가 버티고 있었다. 특히, 그 시기 선동렬 선수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투수 주요 3개 부문의 상을 3연패 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강철 선수는 이런 그들의 활약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만의 기록을 써 내려 갔다. 그리고 조계현 선수는 물론이고, 최고의 투수 선동렬 선수도 해내지 못한 10년 연속 두자리 승수 및 10년 연속 세자릿수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낸다. 이 기록은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기록이다. 이런 대기록 달성을 위해 그는 소리 소문없이 꾸준히 기록을 쌓아가고 있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91 해태 36 - 15 - 11 - 3 193 3.19 214.2
1992 해태 33 - 18 -- 9 - 0 155 3.44 217.1
1993 해태 31 - 10 - 10 - 1 131 3.04 154.0
1994 해태 33 - 12 - 15 - 1 140 3.64 185.2
1995 해태 29 - 10 - 10 - 1 126 3.30 150.0
■ 타이거즈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다
1995년 시즌이 끝나고 해태 타이거즈에는 일대 변화가 생긴다. 팀 내 기둥 투수인 선동렬 선수가 시즌이 끝나고,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을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은 선동렬 선수가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이 벌벌 떨게 만드는 반사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다음 시즌부터 시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팀은 1993년 이후 무려 3년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그 다음해에도 우승 차지하는 등 2연패를 이루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강철 선수가 있었다. 그는 선동렬 선수가 빠져나간 공백을 훌륭히 메우며 선배인 김정수 , 조계현 선수와 함께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또한, 이대진, 故 김상진 선수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잘 리드하면서 선동렬 선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결국, 그는 1996년 한국 시리즈 MVP를 차지하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8년에는 무려 7년만에 15승 이상의 승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96 해태 28 - 10 - 9 - 1 119 - 2.46 153.2
1997 해태 30 - 11 - 3 - 2 128 - 2.99 162.2
1998 해태 31 - 15 - 11 0 160 - 3.11 179.1
■ 잠깐의 외도와 복귀
1999년 이강철 선수에게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최대의 시련기가 찾아왔다. 데뷔이후 큰 부상한번 없이 한해도 거르지 않고 두 자릿수 승리를 챙겨왔던 그가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고 수술이후 재활에만 매달린 것이다. 이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는 한 시즌을 쉬어야 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FA(자유계약)제도가 신설되면서 첫 번째 혜택을 받는 수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환경에서 운동을 시작하려는 마음으로 2000년 삼성과 8억원의 대박 계약을 이끌어내며 늦은 나이에 팀을 옮기는 과감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저하된 구위와 코칭스태프와의 불화 등이 겹치며 삼성 라이온즈에서 자리를 잡지 목하고 단 1승만 거둔 채 2001년 7월말 해태 타이거즈로 복귀를 한다(복귀 첫 경기는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안타깝지만 실패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복귀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며, 중간과 마무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 해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99 해태 ------- 시즌 결장 ----------
2000 삼성 14 - 1 4 - 0 - 20 - 7.30 37.0
2001 기아 27 - 2 3 - 1 - 50 - 6.91 56.0
2002 기아 66 - 5 2 - 17- 97 - 3.17 105.0
2003 기아 67 - 6 4 - 9 - 57 - 1.98 68.1
■ 아쉬운 선수 생활 말미
그 이름답게 강철 같은 어깨를 자랑하며, 평생 선수 생활을 할 것 같았던 그도 선수 생활 말미가 찾아왔다. 기아 타이거즈 팬들로부터 조차도 “이제 이강철도 다 됐구나..”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된 것이다.
그 계기는 광주에서 펼쳐진 2004 시즌 두산 베어스와의 준 플레이오프 경기였다. 1승으로 두산 베어스가 상대 전적에서 앞선 가운데, 2차전 경기는 연장 11회까지 무승부가 이어지며 반드시 2승을 거둬야 하는 규정상, 잠실에서 3차전 승부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신용운 선수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이강철 선수는 연장 12회초 만루 상황에서 홍성흔 선수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하며, 우승에 대한 꿈을 접게 만들었다. 한편, 앞선 1차전에서도 안경현 선수에게 승부에 쐐기를 박는 3점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진데 이어 2차전에서도 중요한 순간 만루 홈런을 허용하자 여기, 저기에서 그의 선수 생활 지속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강철 선수는 선수 생활의 기로에 놓인 이 시기에 이대로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시즌이 끝나고 구단과 재계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한 2005 시즌 초반 3경기까지 성적이 2개의 홀드에 방어율 1.35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예상치 않게 팀이 연패에 빠지며 꼴찌로 내려앉고, 그 자신마저 16경기에나 등판하며 팀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투구를 할 정도로 체력 저하를 호소하며 5월 중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컨디션 회복 후 다시 복귀할 것으로 보여졌지만, 나아지지 않는 팀 성적으로 인해 점점 그의 설자리가 없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젊은 투수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한달 후 복귀한 롯데 자이언츠와의 부산 경기에서 이대호 선수에게 큼지막한 3점 홈런을 허용하고, 6월 29일 SK 와이번스와의 광주 경기에서는 상대한 두 타자 모두에게 안타를 내주며, 상대의 주루사로 인해 간신히 이닝을 마무리 지으며 마운드를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기가 17년 프로생활의 마지막 경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은퇴 경기와 은퇴식은 고사하고, 은퇴 발표에 대한 정식 기자 회견도 없이 그는 유니폼을 벗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2004 기아 79 - 6 2 - 7 - 56 - 2.95 85.1
2005 기아 18 - 0 1 - 0 - 15 - 3.20 19.2
■ 새로운 그의 인생 -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
그는 기아 타이거즈와 자매 결연을 맺은 미국 프로야구 미네소타 트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기 위해 작년 말부터 준비를 마치고, 올해 초부터 이미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지난 2월 15일 미국으로 출국해서 3월초까지 기아 타이거즈의 플로리다 훈련 캠프에 합류한 뒤 3월 8일부터 본격적인 연수 생활을 시작했다.
4~5월 두 달 동안은 미네소타 산하 루키리그 팀에서, 6월에는 싱글A팀 미러클에서, 7월에는 더블A팀 뉴브리튼에서, 그리고 8월에는 트리플A팀 로체스터에서 단계적으로 레벨을 올려 연수를 받게 될 예정이다.
아직은 팬들이나 본인 스스로 코치라는 직함이 낯선 상황이다. 아쉽게 선수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성공 여부에 우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선수시절 항상 훈련과 노력, 성실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지 않았는가? 가르친다는게 어려운 일인것은 분명하지만, 항상 후배 선수들에게 맏형 같은 존재로서 귀감이 되어 왔기에, 지도자로서도 최고의 위치에 오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타이거즈 투수 코치로 다시 무등 경기장 마운드에 오르는 그날을 기다려 보겠다.
연도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통산 602 152 112 53 - 1749 3.29 2204.2
[ 글을 마치며... ]
원래 예정대로 라면 4월 11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광주 지방에는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경기는 취소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은퇴식도 하루 뒤로 연기되었다. 하루라도 일찍 그를 떠나보내기 싫은 팬들의 마음이 하늘까지 전달이 된 모양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강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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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철 선수, 그의 라이벌
① 한희민 (빙그레 이글스-삼성 라이온즈, 1986~1993)
그가 프로에 입단했던 1989년은 잠수함 투수들이 봇물을 이루던 시기였다. 중고 신인으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1988년 올림픽을 마치고 입단한 대어급 신인 선수들을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한 박정현(태평양-쌍방울) 선수가 있었으며, 재일 동포 출신으로 모든 경기에서 완투에 가까운 투구를 선보였던 김성길(삼성-쌍방울) 선수도 있었고, 내 놓으라 하는 OB 베어스 투수진에서 에이스 노릇을 했던 김진욱(OB) 선수가 있었다. 이 외에도 1988년 신인왕 이용철(MBC-삼성) 선수와 박동수(롯데), 김청수(롯데) 선수 등등 각 팀에서 선발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와 쌍벽을 이루며 최고의 잠수함 투수자리를 다투던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희민(빙그레) 선수다. 둘은 공통점도 있다. 앞에 열거한 선수 중에서 박정현 선수를 제외하고는 사이드 암 스로우 투수지만, 둘은 정통 언더 핸드 투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두 선수는 ‘홈런 공장 공장장’이라는 불명예 직함도 같이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선수는 개인이나 팀으로나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발전을 해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해태 타이거즈와 빙그레 이글스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갔다. 자연스럽게 두 선수는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라이벌로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성적에 있어서 라이벌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다.
② 선동렬 (해태 타이거즈-주니치 드래곤즈, 1985~1999)
기록으로만 놓고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충분히 라이벌이라는 수식을 붙이고도 남는다. 이강철 선수가 최고 투수로 기억되는 그에 비해 승리도 더 많이 했고, 삼진도 더 많이 잡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강철 선수 본인은 그런 관계를 거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선동렬 선수의 최다 탈삼진 기록을 경신한 직후 인터뷰에서도 “좋아하는 후배가 기록을 달성했으니, 기쁘게 생각해 달라”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89년 이강철 선수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국보급 투수’ 선동렬 선수와 룸메이트가 되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이강철 선수는 그에게 투수로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수업이 선동렬 선수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1995년까지 7년 동안 이어졌다. 최고 투수였던 그를 만난 건 이강철 선수로서는 프로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③ 조계현 (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 1989~2001)
조계현 선수는 팀의 마스코트 호랑이답게 포효할 줄도 알고,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지녀 타이거즈 팬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선수였다. 반면, 이강철 선수는 곱상한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격에다, 조용조용한 성격을 가진 선수였다. 홈런을 많이 맞긴 했지만, 삼진은 그 어떤 투수 보다 많이 잡아냈다. 하지만, 포효하기 보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모자를 만지는 선에게 그의 기쁨을 표출할 뿐이었다. 이렇게 두 선수는 크게 대비 되는 스타일을 지닌 선수였다.
투구 스타일도 대비되었다. 이강철 선수는 언더 핸드 투수치고는 빠른 공을 던지고, 삼진도 많이 잡는 등 잠수함 투수 그 이상의 공격적 투구를 했지만 크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구속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빠른 공과 ‘팔색조’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다양한 변화구 구사 능력을 가지는 조계현 선수는 타자를 향해 더욱더 공격적 투구스타일로 윽박질렀다. '싸움닭'이라는 그의 별명이 그 사실을 대변해 준다.
④ 송진우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9~현재)
참으로 복잡한 관계다. 때론 라이벌이었다가 협력의 관계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두 선수는 출생 연도가 같고, 입단 동기이다. 하지만, 이강철 선수는 송진우 선배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같은 1966년생임에도 빠른 1966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진우 선수가 동국대학교 84학번이고, 이강철 선수는 85학번이다. 그럼에도 다시 입단 동기가 된 것은 서울 올림픽 참가로 인해 입단을 1년 늦췄기 때문이다.
● 첫 번째 만남 - 운명의 시작
둘의 만남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광고 3학년이었던 송진우 선수와 광주일고 2학년 이었던 이강철 선수가 1983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만난다. 그리고 문희수(해태) 선수의 활약으로 광주일고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 들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 두 번째 만남 - 후배가 되다
그 들이 다시 만난 곳은 동국대학교에서였다. 당시 동국대는 김인식(현재 한화 이글스 감독) 감독을 영입하고 난 뒤에, 대학교 무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1985년 고교 동창 박준태(태평양-LG) 선수와 함께 85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그 곳에는 1년 선배 송진우 선수가 미리 입학해 있었다. 하지만, 1984년 대통령기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송진우 선수는 이강철 선수가 입단한 그 해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신입생인 그에게 공을 넘기고 주로 타자로 뛰어야 했다. 마운드에서 에이스 역할을 담당한 이강철 선수는 동국대를 대학 최강으로 이끌며 주목을 끌었고, 송진우 선수는 이 시절 어깨를 쉴 수 있어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중에 밝혔다.
이렇게 대학교 무대를 평정했던 이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야구 대표팀에도 나란히 선발되어 국가대표로 활약하게 된다.
● 세 번째 만남 - 냉정한 프로 세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이강철 선수는 연고지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되어 조계현, 이광우 선수와 함께 입단하게 된다. 한편, 송진우 선수도 연고팀인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게 되고, 이때부터 다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당시 해태와 빙그레는 최강의 전력을 뽐내며 페넌트레이스와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을 다투던 팀이었다. 이런 팀에 나란히 입단하게 되었으니, 경쟁관계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강철 선수는 ‘투수 왕국’ 해태 타이거즈 선발진에 이름을 올리고, 신인 시절부터 최고의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첫 해 15승8패 5세이브를 기록한 이후, 4년 연속 15승과 10년 연속 두 자리 승수의 위업을 세운 것이다. 송진우 선수도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투입되어 강속구를 뿌렸다.
그리고 프로의 비정함을 맛볼 수 있는 첫 사건이 1992년 시즌 종료를 앞둔 9월 17일과 18일 벌어졌다. 당시 두 선수의 승수는 똑같은 18승. 다승 공동 1위였다. 남은 경기는 2경기. 두 선수 모두 2경기 중 한경기는 출장할 수 있는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해태와 빙그레의 대전에서 맞대결이었다.
먼저 등판을 한건 이강철 선수였다. 9월 17일 선발로 나선 것이다. 맞상대는 한희민 선수. 하지만 난조를 보인 이강철 선수는 무려 6점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예상되었다. 그런데 5회초 예상치 못한 선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송진우 선수였다. ‘선발 투수는 무조건 5이닝을 채워야 승리 투수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한다면, 송진우 선수가 승리 투수가 될 판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해태 타이거즈는 패했고, 이강철 선수도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송진우 선수는 승수를 19승으로 바꾸며 다승 단독 1위로 올라섰다. 지금도 이 일을 두고 찬반 양론이 거센 가운데, 당시 여론은 비난이 우세했던 걸로 기억된다.
아무튼 이강철 선수 본인의 심정은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고, 특히 주위 팀 관계자들이 더 분해했다. 그래서 오기를 발동해서 그 다음날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승리의 운명은 이강철 선수에게 미소 짓지 못했다. 승리가 눈 앞에 보인 8회말 5-4로 앞서있는 상황에서 장종훈 선수에게 역전 2점 홈런을 맞고, 승수 대신에 패수만 늘리고 시즌을 마감했다. 자연스럽게 송진우 선수가 다승왕을 차지했고, 25 세이브 포인트(세이브+구원승을 합산한 점수)를 올려, 동시에 차지하기 힘든 부분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아이러니 한건 이런 무모한 대결로 인해, 다음 시즌(1993년) 두 선수 모두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강철 선수는 다음 시즌에 두 자릿수 승수(10승 10패 1세이브)를 기록하긴 하지만, 입단 이후 이어오던 15승 이상 기록을 4년에서 중단해야 했다. 송진우 선수도 타이틀 홀더 답지 않게 7승 7패 8세이브의 부진에 빠졌고, 특히 현재까지 17시즌(올해 제외) 프로 생활 동안 유일하게 100이닝 이하를 던진 시즌으로 기록된다.
당시 이 일에 대해서 절친한 두 선수가 지금은 웃고 이야기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찜찜한 기분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 마지막 만남 - 이제는 선의의 경쟁
이제 이강철 선수는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송진우 선수와는 더 이상 대결을 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두 선수는 10여년전에 정정당당하게 겨루지 못한 승부를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다투는 아름다운 모습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가 두 선수의 라이벌 구도 형성의 최고의 절정기였다.
사실 기록적인 면에서 두 선수의 승부는 이뤄지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이강철 선수는 줄곧 선발투수로 활약했었고, 송진우 선수는 선발보다는 마무리 쪽에서 투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강철 선수의 기록이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00년 을 전후로 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이강철 선수가 1999년 부상으로 그 해 시즌을 통째로 결장한 것이다. 이어 부상 후유증으로 선발진에서 탈락하고, 보직마저 중간 계투로 변경되었다. 반면 송진우 선수는 선발진에 고정이 되면서, 회춘(?)에 가까운 놀라운 피칭을 선보이며 기록 대결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두 선수의 흥미로운 대결이 펼쳐졌던 부문은 다승과 탈삼진이었다. 기록 경신의 기준은 선동렬 선수의 기록(146승, 1,698삼진)이었다. 처음에는 이강철 선수가 근접해 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유로 기록을 추가하지 못하고, 송진우 선수의 추격을 허용했다.
결국, 최다승 부문에서는 송진우 선수가 2002년 4월 23일 두산 베어스와의 청주 경기에서 승리를 기록하며 선동렬 선수의 기록을 먼저 뛰어 넘게 된다. 이강철 선수는 2004년 4월 14일 SK 와이번스와의 인천경기에서 마침내 선배의 기록을 뛰어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은 존경하는 선배의 기록을 먼저 깨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그걸 무척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 아쉬움을 달래줄 기록을 2004년 5월 13일 세우게 된다. 탈삼진 부문에서 송진우 선수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었던 이강철 선수는 이날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강귀태 선수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마침내 존경하는 선배의 기록을 깨는 1,699개를 달성하며, 탈삼진 부문에서 한국 프로야구 1위 선수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5월 21일에는 프로 첫 1,700 탈삼진 고지에도 먼저 올랐다.
그러나 송진우 선수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었던 만큼, 5월 22일 자신이 불펜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송진우 선수는 기아 타이거즈 타자들을 상대로 삼개 3개를 얻어내어 단숨에 1,702 고지를 밟으면서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로써 투수와 관련된 주요 ‘최다’기록(다승, 삼진, 이닝, 타자, 선발 등판)은 모두 송진우 선수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두 선수의 경쟁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젊은 투수 못지않은 몸 관리와 마운드에서의 성실성으로 서로가 최고의 기록을 달성할 수 있도록, 최고의 선의의 경쟁자로서 서로를 이끄는 모습으로 우리 팬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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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 ‘공짜’가 선정한, 그의 최고의 경기 >>]]]]]]]]]]]]]]]]]]]
■ ‘공짜’가 선정하는 이강철 선수의 최고 경기
1996년 10월 22일 해태 타이거즈 vs 현대 유니콘스 한국시리즈 5차전 잠실 경기
: 3-1 해태 타이거즈 승리, 이강철 선수 세이브
1996년 시즌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는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투타의 핵심 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선동렬 선수가 1995년 시즌을 마치고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을 했고, 김성한 선수는 1995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에 팀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던 두 선수를 잃고 나자 많은 전문가들은 이제 종이 호랑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급기야 꼴찌 후보로까지 전망했다. 그 예상은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현실화가 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팀 내에서 코치진과 선수단사이에 항명사태로 이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이제 해태 타이거즈는 ‘끝난게 아니냐?’라는 전문가들의 설득력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즌이 거듭되자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섭게 뭉쳐서 승리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고, 신생팀 현대 유니콘스와 한국 시리즈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시리즈는 이강철 선수를 위한 무대였다. 3차전과 6차전 선발승을 거두며 2승 1세이브의 기록으로 팀이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최우수 선수로까지 선정되었다. 한편, 3차전 완봉승을 이끌어낸 호투는 한국 시리즈 사상 5번째 대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차전 경기를 최고의 경기로 꼽는 이유는, 이 경기가 한국 시리즈 패권을 다투는데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었고, 그 역할을 이강철 선수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양 팀은 광주와 인천에서 각각 1승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2승 2패로 호각세를 보였다. 특히, 3차전에서 이강철 선수가 완봉승을 거두자, 현대 유니콘스는 4차전 경기에서 정명원 선수를 앞세워 한국 시리즈 사상 첫 노히트노런 경기를 이끌어 냈다. 이렇게 양팀의 분위기는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차전 경기가 잠실에서 야간 경기로 펼쳐졌다. 해태는 선발 조계현 선수의 호투와 현대 타자들의 집중력 부족으로 8회말까지 3-1로 앞서나갔다. 승부가 거의 기울어져 가던 그때 현대가 마지막 찬스를 잡았다. 9회초 2사 주자 2, 3루를 만든 것이다. 안타 한방이면 동점이 되는 상황이었다. 타석에는 신인 박진만 선수가 들어섰고, 이때 해태 타이거즈는 마무리 투수 김정수 선수를 마운드에서 내리고, 선발 투수인 이강철 선수를 전격 투입한다. 김응룡 감독으로서는 이 대목이 승부처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재박 감독도 박진만 선수 대신에, 좌타자 이희성 선수를 대타로 내보냈다. 하지만,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던 이강철 선수는 이희성 선수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고, 시리즈 전적에서 우위를 보인 해태 타이거즈는 다음날 이강철 선수를 다시 선발 투수로 등판시켜 승리를 따내며, 4승 2패로 통산 8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