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5. 18:17
2007년 6월 15일 선수협회 기사
“참 착하디 착했는디...”
기아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의 경기가 열린 6월 10일 무등 야구장. 경기가 끝나자 모두들 출구로 향하기 바쁜 가운데, 지긋한 나이의 한 야구팬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우중간 관중석 한구석에 걸린 대형 걸개그림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본 걸개그림 속에는 지난 1999년 6월 10일, 그를 살리려는 가족과 야구팬들의 헌신을 뒤로하고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늘로 가버린 故 김상진(해태 타이거즈 투수)선수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이날은 미래 타이거즈 투수 계보를 이을 것으로 촉망받았던 유망주가 숨을 거 둔지 8년이 되는 날이었던 것. 그래서 경기장 우측 관중석에는 그를 추념하기 위한 대형 걸개그림 2개가 걸려있었다.
◎ 故 김상진 선수를 애도하기 위해 우측 관중석 양쪽으로 나란히 걸린 걸개그림
날이 날이니 만큼 타이거즈 선수들도 이날만큼은 꼴찌를 달리고 있음에도 고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강한 승부근성을 발휘하며, 1위 팀을 상대로 3-2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무려 24일 만에 맛보는 연승의 기쁨과 함께, 하늘에서 지켜보았을 고인에게도 승리의 기쁨을 선사한 하루가 되었다.
특히 이날 승리의 수훈갑은 고인과 1996년 입단 동기였던 장성호. 2-2로 맞선 6회말 우측 담장을 넘기는 역전 1점 홈런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개인적으로 1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 되는 이 타구는 묘하게도 고인의 걸개그림 옆에 떨어지며, 동기이자 친구였던 고인에게 바치는 홈런이 되었다. 장성호는 고인이 숨을 거뒀던 지난 1999년 당일 경기에서도 이날처럼 역전 타점과 쐐기 점수를 올리며 동기의 가는 길을 승리로 배웅한 적이 있었다.
◎ 6회말 ‘10년 연속 두 자릿수’ 기록에 해당하는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장성호의 모습
고인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장성호와 함께 투타에서 팀의 기둥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또한 현재 다승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박명환(1996년 입단 동기)과도 멋진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그가 일찍 하늘나라 마운드로 떠나면서 아쉬움으로 남고 말았다. 특히나 이날 경기에서 ‘1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라는 꾸준함을 보여준 장성호의 홈런은, ‘김상진도 살아있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을 더욱 진하게 남기게 만들었다.
◆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을 간직한 NO. 11 김상진
진흥고 3학년이던 1995년, 김상진은 팀이 우승을 차지했던 제2회 무등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 우수투수, 홈런상 등 4관왕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서재응, 김상훈(이상 광주일고)과 함께 단 3명뿐인 해태 타이거즈의 1996년 연고지 고졸우선지명을 받고 당시로는 팀 사상 고졸 최고액인 총액 1억 2천만원에 고향팀과 계약했다. 당시 다른 두 명의 선수가 모두 대학행을 선택한 반면, 김상진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일찍 프로행을 결정한다.
그리고 처음 참여한 해외 전지훈련에서 “고교를 갓 졸업한 선수답지 않게 침착하고 차분해, 대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으며 눈도장을 찍은 그는 막강 타이거즈 라인업에 합류했고, 1996년 첫 시즌에서 그해 고졸 최다승인 9승을 올리며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9승 5패 4.29)을 펼쳤다.
2년차 징크스를 걱정했던 1997년에도 그는 오히려 신인 시절 넘기지 못한 규정 투구횟수를 돌파하며, 전년도보다 더욱 뛰어난 활약(9승 10패 1세이브 3.60)으로 확실한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그해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는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남긴 무대였다. 앞선 2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2.1이닝 만에 조기 강판되며 팀의 대패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는, 3승 1패로 앞서있던 5차전 선발로 나와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도 남는 역투를 펼쳤다. 4회부터 9회까지 모든 타자를 퍼펙트로 처리하며, 9이닝 2안타 1실점 완투승. 이는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이었다. 그 덕분에 아무나 맛보기 힘든 우승 확정 순간을 마운드 위에서 경험하는 영광도 누렸다. 현재까지도 타이거즈 마지막 우승이었던 이 장면은 그 때문인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듬해 두 자리 승수를 올릴 것이라는 기대 속에 시즌을 맞이했지만, IMF로 인한 모기업의 재정난과 이종범의 일본 진출 등으로 팀 전력이 많이 약화된 가운데, 3점대의 평균자책점이었음에도 6승 11패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시즌 막판이던 9월 19일 잠실 OB 베어스 전에서 2회말 투구 도중 목이 아파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온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지난 1996년 가을에 당했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근육통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10월초 광주에서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던 도중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10월 23일 전남대 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다른 병원에서도 마찬가지. 생존기간은 짧게는 3개월에서 최대 1년. 이제 21살 청년에게는 믿기지 않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사실을 한 달 뒤에나 알 수 있었다. 좌절감 같은 혹시 모를 우려 때문이었다. 언론 역시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금지를 뜻하는 언론 용어)처럼 이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더욱 늠름한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후 김상진을 살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프로야구 선수들과 팬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IMF로 모두가 어려운 시절임에도 그를 살리기 위한 각계의 성금이 모아져 전달되는 따뜻한 모습이 줄을 이었다. 해태 구단도 그의 치료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보류 선수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암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한지 8개월만인 1999년 6월 10일 오후 3시 55분, 날개를 채 펴보기도 전인 22살을 갓 넘긴 꽃 다운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