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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5 이번에도 그냥 지나친 6월 10일
  2. 2007.10.05 6월 10일, 고인의 기일
  3. 2007.10.05 남해에서도 이어진 경기 시간 약속 어기기
2007. 10. 5. 18:21
2007년 6월 27일 선수협회 기사


 ‘꼴찌를 달리고 있는 팀 사정상 추모행사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시와 현재의 모기업이 다르기 때문이었을까?’

 6월 10일은 지난 1996년부터 해태 타이거즈 투수로 몸담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위암 발병으로 1999년 6월 10일, 22살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하늘나라로 간 故 김상진 선수의 8주기였다.

 그래서 이날 경기가 열린 무등 야구장 우측 관중석에는 고인을 추념하는 2개의 대형 걸개그림이 내걸렸다. 이 중 하나의 걸개그림을 내걸었던 故 김상진 선수의 인터넷 팬 카페 ‘천상비애(天上飛愛)’ 회원들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떡을 돌리며 선전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에대해 천상비애 운영자 김소정(23)씨는, “오래전부터 故 김상진 선수를 좋아해왔던 사람들끼리 슬픔을 함께 나누며, 김상진이라는 이름이 빨리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날을 기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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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김상진 선수의 인터넷 팬 카페 ‘천상비애(天上飛愛)’회원들이 내건 걸개그림

 하지만 이날 고인과 관련된 추모행사는 이것이 전부였다. 추모 묵념이나 검은 리본 착용 그리고 구단 깃발의 조기 게양은 큰 욕심(?)이더라도, 최소한 이날이 어떤 날인지 전광판을 통한 안내 정도는 이뤄져야 했지만 고인과 관련된 그 어떤 분위기도 느낄 수 없었다. 또한 한 팬이 구단 홈페이지를 통한 건의에서 미 프로야구 ‘재키 로빈슨 데이’처럼, “고인의 등번호였던 11번을 이날 등판하는 선발 투수에게 달게 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이것도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상 걸개그림을 내건 팬들이 아니었다면, 야구장을 찾은 관중들이나 TV 시청자들 모두에게 이날은 평범한 하루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올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추모행사 대부분은 이처럼 팬들 개인적인 힘으로만 진행되었고, 구단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지난 2001년 2주기부터 7년째 이날을 잊지 않고 추모하고 있는 ‘천상비애’ 김소정씨도 “해태 선수라 그런것 같다. 처음엔 섭섭했지만, 이제는...”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공교롭게도 이날 잠실에서는 두산 베어스 구단이 '플레이어스 데이(Player's Day)'를 마련해 ‘불사조’ 박철순 전 코치를 초청, 팬 사인회와 시구 행사를 가졌다. 구단이 직접 마련한 이 자리에서 올드팬들에게는 향수를, 새로운 야구팬들에게는 말로만 듣던 전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며, 많은 호응과 찬사를 받았다. 특히 잊혀져 가는 선수를 다시 기억 속에서 꺼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담긴 행사였다. 반면, 기아 구단은 9번 우승을 차지한 팀답게 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했음에도 이러한 행사가 전무한 상태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우승을 차지했던 당시 주역의 기일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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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거즈 팬들에 의해 걸렸던
또 다른 故 김상진 선수 추념 걸개그림

 예전에 김대현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1988년 8월 27일 동료(이순철 현 방송 해설위원)를 옆에 태운 뒤 직접 차를 몰고 서울로 이동 중 천안휴게소에 진입하다 트럭 뒤에 부딪혀 현장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던 해태 타이거즈 투수였다. 묘하게도 故 김대현은 여러모로 故 김상진과 비슷한 점들이 많다.

 당시 소속팀이 같은 것은 물론이고, 故 김대현이 1986년 입단했다면 故 김상진은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1996년에 입단한 선수였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활동기간이 3년으로 똑같았다. 또한 포스트시즌에서 인상적인 모습(1987년 플레이오프 2승, 1997년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보인점도 닮았다. 안타깝게도 두 자릿수에 1승이 모자란 9승이 최다승이라는 점도 같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만으로도 팀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닮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故 김대현이 숨을 거둔지 19년이 된 현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데, 故 김상진은 이 점을 닮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주변의 역할에 달려있다. 10년 가까이 김상진이라는 이름이 기억되어 온 것은 팬들의 역할이 컸다. 앞으로는 구단의 몫이다. 당장 10년 후 故 김상진 선수가 어떤 존재로 남아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자.

Posted by 공짜
2007. 10. 5. 18:17
2007년 6월 15일 선수협회 기사


 “참 착하디 착했는디...”

 기아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의 경기가 열린 6월 10일 무등 야구장. 경기가 끝나자 모두들 출구로 향하기 바쁜 가운데, 지긋한 나이의 한 야구팬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우중간 관중석 한구석에 걸린 대형 걸개그림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본 걸개그림 속에는 지난 1999년 6월 10일, 그를 살리려는 가족과 야구팬들의 헌신을 뒤로하고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늘로 가버린 故 김상진(해태 타이거즈 투수)선수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이날은 미래 타이거즈 투수 계보를 이을 것으로 촉망받았던 유망주가 숨을 거 둔지 8년이 되는 날이었던 것. 그래서 경기장 우측 관중석에는 그를 추념하기 위한 대형 걸개그림 2개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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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김상진 선수를 애도하기 위해 우측 관중석 양쪽으로 나란히 걸린 걸개그림

 날이 날이니 만큼 타이거즈 선수들도 이날만큼은 꼴찌를 달리고 있음에도 고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강한 승부근성을 발휘하며, 1위 팀을 상대로 3-2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무려 24일 만에 맛보는 연승의 기쁨과 함께, 하늘에서 지켜보았을 고인에게도 승리의 기쁨을 선사한 하루가 되었다.

 특히 이날 승리의 수훈갑은 고인과 1996년 입단 동기였던 장성호. 2-2로 맞선 6회말 우측 담장을 넘기는 역전 1점 홈런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개인적으로 1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 되는 이 타구는 묘하게도 고인의 걸개그림 옆에 떨어지며, 동기이자 친구였던 고인에게 바치는 홈런이 되었다. 장성호는 고인이 숨을 거뒀던 지난 1999년 당일 경기에서도 이날처럼 역전 타점과 쐐기 점수를 올리며 동기의 가는 길을 승리로 배웅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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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회말 ‘10년 연속 두 자릿수’ 기록에 해당하는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장성호의 모습

 고인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장성호와 함께 투타에서 팀의 기둥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또한 현재 다승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박명환(1996년 입단 동기)과도 멋진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그가 일찍 하늘나라 마운드로 떠나면서 아쉬움으로 남고 말았다. 특히나 이날 경기에서 ‘1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라는 꾸준함을 보여준 장성호의 홈런은, ‘김상진도 살아있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을 더욱 진하게 남기게 만들었다.

◆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을 간직한 NO. 11 김상진

 진흥고 3학년이던 1995년, 김상진은 팀이 우승을 차지했던 제2회 무등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 우수투수, 홈런상 등 4관왕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서재응, 김상훈(이상 광주일고)과 함께 단 3명뿐인 해태 타이거즈의 1996년 연고지 고졸우선지명을 받고 당시로는 팀 사상 고졸 최고액인 총액 1억 2천만원에 고향팀과 계약했다. 당시 다른 두 명의 선수가 모두 대학행을 선택한 반면, 김상진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일찍 프로행을 결정한다.

 그리고 처음 참여한 해외 전지훈련에서 “고교를 갓 졸업한 선수답지 않게 침착하고 차분해, 대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으며 눈도장을 찍은 그는 막강 타이거즈 라인업에 합류했고, 1996년 첫 시즌에서 그해 고졸 최다승인 9승을 올리며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9승 5패 4.29)을 펼쳤다.

 2년차 징크스를 걱정했던 1997년에도 그는 오히려 신인 시절 넘기지 못한 규정 투구횟수를 돌파하며, 전년도보다 더욱 뛰어난 활약(9승 10패 1세이브 3.60)으로 확실한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그해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는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남긴 무대였다. 앞선 2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2.1이닝 만에 조기 강판되며 팀의 대패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는, 3승 1패로 앞서있던 5차전 선발로 나와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도 남는 역투를 펼쳤다. 4회부터 9회까지 모든 타자를 퍼펙트로 처리하며, 9이닝 2안타 1실점 완투승. 이는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이었다. 그 덕분에 아무나 맛보기 힘든 우승 확정 순간을 마운드 위에서 경험하는 영광도 누렸다. 현재까지도 타이거즈 마지막 우승이었던 이 장면은 그 때문인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듬해 두 자리 승수를 올릴 것이라는 기대 속에 시즌을 맞이했지만, IMF로 인한 모기업의 재정난과 이종범의 일본 진출 등으로 팀 전력이 많이 약화된 가운데, 3점대의 평균자책점이었음에도 6승 11패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시즌 막판이던 9월 19일 잠실 OB 베어스 전에서 2회말 투구 도중 목이 아파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온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지난 1996년 가을에 당했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근육통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10월초 광주에서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던 도중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10월 23일 전남대 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다른 병원에서도 마찬가지. 생존기간은 짧게는 3개월에서 최대 1년. 이제 21살 청년에게는 믿기지 않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사실을 한 달 뒤에나 알 수 있었다. 좌절감 같은 혹시 모를 우려 때문이었다. 언론 역시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금지를 뜻하는 언론 용어)처럼 이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더욱 늠름한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후 김상진을 살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프로야구 선수들과 팬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IMF로 모두가 어려운 시절임에도 그를 살리기 위한 각계의 성금이 모아져 전달되는 따뜻한 모습이 줄을 이었다. 해태 구단도 그의 치료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보류 선수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암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한지 8개월만인 1999년 6월 10일 오후 3시 55분, 날개를 채 펴보기도 전인 22살을 갓 넘긴 꽃 다운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다.

Posted by 공짜
2007. 10. 5. 18:12
2007년 6월 8일 선수협회 기사


 비록 2군 경기지만 지난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남 남해군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프로야구 경기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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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프로야구 경기가 펼쳐진 남해 스포츠파크 야구장 모습

 그 동안 남해군은 경기 개최를 위한 시설을 가지고 있음에도 현실적 문제로 경기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야구 저변 확대를 바라는 한국야구위원회(이하 KBO)의 의지가 올해부터 현실화되면서, 지난 4월 춘천에 이어 두 번째로 비 연고지역 경기를 이곳에서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번에 남해에서 개최된 2군 리그는 프로 8개 구단의 모든 2군 팀들이 사상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되면서 더더욱 큰 관심을 모았다. 그것은 선수들은 물론이고, 팬들에게도 희소식이었다. 평소에도 접하기 힘든 2군 경기와 선수들을 한 장소에서 모두 다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전 경기는 상대 리그 팀들끼리 맞붙는 인터리그 형식이었고, 모두 24경기(3경기 우천 취소)가 2개 경기장에서 하루 4경기를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경기 시간은 6일 내내 오전 11시와 오후 3시로 정해졌다. 분명 경기를 주최하고 후원하는 KBO 홈페이지와 남해군에서 내보낸 보도 자료에 나온 사항이었다.

 이는 경기 5일째까지만 해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었던 5월 27일 일요일 경기에서 갑작스런 변경이 발생했다. 1경기가 오전 10시에 시작하고, 2경기는 오후 1시에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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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제와 다르게 5월 27일 경기 시간을 안내해준 KBO 홈페이지

 문제는 이런 내용이 이날 경기장을 찾을 예정이었던 사람들에게 충분히 공지가 되었냐는 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기를 주최하고 후원하는 KBO와 남해군 홈페이지 어느 곳에서도 시간 변경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KBO 홈페이지는 당일에도 변경 전 시간인 11시와 3시라고 틀린 정보를 버젓이 안내하고 있었고, 남해군 홈페이지에서는 보도 자료 이외에 이곳에서 야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가 아예 없었다. 이날 유일하게 정확한 시간을 안내해준 곳은 일반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야구캠프’ 홈페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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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유일하게 정확한 경기 시간을 안내해 준 ‘대한야구캠프’ 홈페이지 공지사항

 사실 이러한 시간 변경은 2군 리그에서는 흔한 일이다. 특히 이동일이 걸린 3연전 마지막날의 경우 이동의 편의를 위해 보통 예정시간보다 1~2시간 일찍 경기를 시작하는 것이 자리가 잡혀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잘못된 안내의 역사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때마다 KBO 홈페이지는 매번 3연전 마지막날 경기 시간을 수정 없이 잘못 안내하기 시작했고, 이 정보를 믿고 2군 경기 현장에 뒤늦게 도착하는 팬들을 보는 것은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이렇게 고쳐지지 않고 오래 지속된 문제점이 야구의 저변 확대라는 중요한 취지로 마련된 남해 인터리그에서도 이어질 필요는 없었다. 분명 이번 남해 인터리그는 기존의 2군 리그를 비롯한 야구를 많이 봐왔던 사람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는 점에 비추어 봤을 때 새로운 야구팬 끌어들이기를 거부한 꼴이 되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경기 시간 변경을 문제 삼자는 것이 아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간 변경이 되면 신속하게 안내가 이뤄져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야구팬들을 모시는 중요한 자리인 남해 인터리그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반복이 됨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분명 이번 남해 인터리그를 통해 야구를 처음 접한 팬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야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스포츠’라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남지 않았을까? 분명 반성하고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었다.

Posted by 공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