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3. 01:50



 참 귀하고도 희귀한 장면이었다.

 10월 2일 무등 야구장. 6위가 확정된 타이거즈와 1위가 확정된 와이번스의 대결.

 결정적인 장면에서 나온 양 팀 야수들의 호수비를 바탕으로 투수전으로 진행된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고, 2-2에서 10회말 타이거즈의 공격. 앞선 타석에서 그답지 않게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김원섭이 선두타자로 나와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를 쳐내며 결정적 찬스를 마련했다. 3루 주자만 들어오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

 그래서였을까? 관중석뿐만 아니라 타이거즈 덕아웃에서도 선수들이 잔치 준비(아래 사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나선 이호신이 3루 파울 뜬공으로 물러나면서 기가 꺾이고 만다. 이호신으로서는 지난주 토요일(9월 27일)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포수 파울 뜬공으로 물러난 이후 두 번째 찾아온 기회를 놓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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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들어선 선수는 나지완. 그는 이호신이 물러난 바로 그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쳐냈던 주인공. 이번에도 그에게 찬스가 전달됐고, 덕아웃은 다시 한 번 더 잔치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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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게 웬일? 끝내기가 나왔다. 그런데 끝내기는 끝내기인데, 끝내기 홈런이나 안타를 바랐던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폭투가 나왔다. 와이번스 투수 에스테반 얀이 마치 위협구를 던지듯 타자 머리위를 지나가는 공을 던지고 만 것. 공은 포수 박경완이 손도 대보지 못한 채 뒷 그물을 향하고 있었고, 이 사이 3루 주자가 홈을 밟아 경기 끝. 말 그대로 끝내기 폭투.

 올 시즌 처음인 것은 물론이고, 27년 프로야구 역사상 (포함해서)18번 밖에 없었던 희귀한 장면이었다. 소위 1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하다는 바로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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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 승리를 거둔 타이거즈 선수들은 그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반면, 폭투를 헌납한 얀은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하는 듯 낙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한편, 이 사진속에서는 그 밖의 다양한 모습들도 볼 수 있다.


 한편, 이날 양 팀의 승부는 데자뷰 현상처럼 지난 9월 10일 경기(관련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두 팀은 이날 같은 장소에서 대결을 펼쳤는데, 승부가 연장으로 넘어간 것 뿐 만 아니라, 끝내기를 통해 결과가 판가름 난 것도 같았다. 특별했던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끝내기 장면이 나왔다는 사실. 앞 경기는 올 시즌 1호 홈런을 친 선수에게서 나온 '끝내기 홈런'이었고, 이번 경기는 좀처럼 보기 힘든 '끝내기 폭투'였기 때문.

 그러나 느낌에는 차이가 있었다. 앞 경기가 짜릿한 승부의 맛을 느낄수 있었다면, 이번 경기는 큰 기대 속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있었기 때문. 같은 끝내기라도 허무함이 크게 지배했다. 마치 작년 5월 22일 ‘타이거즈VS자이언츠’에서 나온 이종범의 끝내기 헬멧에 맞는 공처럼.


● 이성우 데뷔 이후 최고의 하루?

 지난 5월 2:3 맞트레이를 통해 와이번스에서 타이거즈로 유니폼을 갈아 입은 이성우(포수). 그가 10월 2일 경기에서 친정팀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기록만 놓고 본다면 프로 입단 이후 최고의 하루.

 첫번째 타석에서 동점을 만드는 희생뜬공을 만든 그는, 팀이 다시 뒤져있던 세번째 타석에서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1점 홈런을 만들어 냈다. 프로 데뷔 이후 첫 홈런(왼쪽 사진)의 감격이었고, 더군다나 동점을 만드는 홈런이라 영양가도 만점. 네번째 타석에서는 비록 점수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귀중한 희생번트까지 성공 시켰다.

 이런 활약 때문인지, 방송사 수훈선수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현장 수훈 선수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역시 생애 첫 경험. 2000년 프로 입단 이후 신고 선수의 대명사가 되었던 이성우. 10월 2일은 잊을 수 없는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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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심 합의 끝에 나온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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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에서 확인 좀 해보시라구요~" 연장 10회초 와이번스의 공격. 선두 이재원이 타석에 들어선 상황에서 한기주의 몸쪽 바짝 붙은 공에 이재원이 1루로 출루한다. 이 때 판정은 몸에 맞은 공. 하지만 조범현 감독의 항의가 이어졌다. 방망이에 맞았다는 것. 그리고 재차 확인 해 줄것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코치진도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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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거센 항의의 결과 4심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협의 끝에 1루에 있던 이재원의 손을 확인한 뒤 결과가 뒤집어 졌다. 공이 몸에 맞은게 아니라, 방망이에 맞고 굴러갔다는 것. 결론은 아웃.


Posted by 공짜
2008. 9. 28. 23:13


(방문일 : 2005년 9월 28일)


 지난 8월, 우리 국민들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보여준 국가대표 선수들의 연이은 선전으로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잠시나마 잊은 즐거운 한 달을 보냈다. 그 때의 환희와 감동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들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4년마다 한 번씩 우리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올림픽의 힘. 개인적으로 처음 기억에 남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0년 전 올림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올림픽은 다른 곳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던 대회. 앞선 ‘84 LA 올림픽도 기억에 남을 법한데 생중계로 본 기억이 없는 것은 의문이다.

 어쨌거나 1988년에 열린 제 24회 서울올림픽. 누군가가 생애 최고의 기억을 뽑아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선택할 만큼 그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지금의 10대들한테 2002 한일월드컵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을듯이.

 그 대회가 지난 9월 17일, 어느덧 20주년이 되었다. 아무리 세월이 빠르다지만 아직도 14인치 금성사 TV 앞에 앉아 개막식을 시작으로 주요 순간을 생중계로 시청했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한데 벌써 20년이나 흐른 것이다.
                                       
                   ◎ '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편집 영상. 1시간 분량.          (영상 출처 = 한국정책방송 - e영상 역사관)


 개인적으로는 올림픽을 보기 위해 학교를 마치면 집까지 열심히 뛰어왔던 기억, 그리고 집에서는 엄마와의 치열한 신경전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 또한 우리 집에 비디오가 있어서 ‘주요 장면을 녹화했으면 얼마나 좋을까’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러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서울올림픽. 역사적으로 봐도 이 대회는 큰 의미가 담긴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이 올림픽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완성-물론 결과적으로는 약 10년 뒤 IMF로 인해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꼴이 되었지만-시켰고, 대외적으로는 더 이상 6.25의 아픔만을 가진 국가가 아님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올림픽 역사학적으로는 냉전으로 등을 돌렸던 미국과 소련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다시 한자리에 모여 사상 최대의 대회로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폐회식에서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이어서가 아니라, 진짜 기억에 남을 최고의 올림픽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절대 잊혀 지지 않을 1988년 그 때 그 올림픽.





● 그 날의 감동이 숨쉬고 있는 '잠실주경기장'
 
 예술적 능력이 떨어져 그 표현을 못하겠지만, 정말 아름다운 경기장이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각이나 원형이 아닌 곡선미가 들어간 디자인이 이를 증명해준다.

 故 동대문 운동장과 장충 체육관이 우리 나라 체육의 1세대라면 2세대는 바로 이 곳이다. 88 서울올림픽과 그 전에 열렸던 86 서울아시안게임이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1985년 허정무의 결승골로 숙적 일본을 꺾고 무려 32년만의 월드컵('86 멕시코) 진출 역사를 쓴 곳도 바로 이 곳 이다. 개인적으로 어릴적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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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구석의 '올림픽 전시관'

 주경기장 바깥 한쪽 구석에 자리한 올림픽 전시관. 가보지는 않았지만 송파구 올림픽 회관에 있는 '올림픽 기념관'이 규모면에서 형이라고 본다면, 이 곳은 아우뻘 되는 시설이다. 입장료도 없고, 나올때는 관리하는 직원이 친절히 방명록도 쓰고 가라고 권유한다. 비록 전시 내용물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서 조용히 그날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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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근과 잠실주경기장
 
  미술 시간에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만 김수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이다.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건축물들 상당수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작품 반열에 올라서 있다. 대표적으로 남산 자유센터(1963년), 세운상가(1968년), 장충동 타워호텔(1969년),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1977년), 한계령 휴계소(1979년), 진주 박물관(1984년), 청주 박물관(1987년) 등이 있다.
 
 눈치가 빠르다면 잠실 주경기장 역시 그가 만들어낸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올 것이다. 김수근이 만든 건축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이 곳 잠실주경기장이다. 의미가 담긴 중요한 시설인 만큼 공사기간도 무려 6년(1978~1984년) 가까이 걸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수근은 서울 아시안게임을 불과 두 달여 앞둔 1986년 6월 14일 간암으로 숨을 거두면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건축물이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이 세상과 작별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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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가 너무나 짧았던 '잠실주경기장'

 서울올림픽의 감동을 안고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8,90년대 한국 최고의 경기장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렸던 잠실주경기장. 그랬던 만큼 3년 전 통로를 거쳐 운동장에 들어섰을때의 그 설레임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몇 분 뒤 그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좌석 곳곳이 노후화와 파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나마 온전한 좌석 여기저기에는 비둘기 똥으로 보이는 오물이 묻어있었기 때문. 과연 이곳이 올림픽의 감동을 안고 있는 곳이 맞는지 의심부터 든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정면에는 당시 조용필 콘서트 준비로 인해 대형 무대(위 오른쪽 사진)가 설치되고 있어서, 더더욱 올림픽 현장의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랬다. 이것이 잠실주경기장의 현재 모습이다. 이미 스포츠 시설의 목적은 상실된지 오래됐고, 그 부수적인 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지난 2002 월드컵 때 전국 곳곳에 최신 종합운동장이 생기며, 이 곳이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릴 수 없게 되면서 부터다. 대표적으로 9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축구팀의 A매치를 전담했지만, 지금은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그 역할이 넘어간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육상 경기가 활발히 열리는 것도 아니다. 이로인해 지금은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나 대형 종교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잠실주경기장은 지난 1984년 완공됐으니, 올해로 24년이 되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한창 전성기를 누려야할 젊은 나이다. 하지만 전성기가 끝난것은 10년이 훌쩍 넘었고, 이제는 활용조차도 미미해져 버렸다. 이러다가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럴일은 없겠지만 후세대에서 개발논리에 밀려 동대문 운동장처럼 철거가 이뤄지지 않을까 걱정도 든다.

 적절한 활용 방안 마련을 통해 하루 빨리 예전의 본 모습을 찾아 올림픽의 영광을 가진 역사적인 시설로 오랬동안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Again 1988






Posted by 공짜
2008. 9. 23. 01:58


 지난 여름 우리 지구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숨 가쁜 여름을 보냈다. 그것은 연초부터 요동치기 시작한 유가가 계속해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온 세상을 들썩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140달러 선에서 고점을 찍고 현재는 100달러 근처까지 내려왔지만, 당시에는 "200달러도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나오는 등 3차 오일쇼크 직전의 위기 상황이었다. 특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아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우리의 경우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직접적 체감은 '주유소 기름값'이었다. 곳곳에서 "운전 못 해 먹겠다"는 아우성이 커져갔고, 대안으로 '대중교통 이용'과 '자동차 O부제 운행'에 대한 공감대가 높아갔다. 또한 경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최고조에 달했다.

 여기에 대체 수단으로 자전거가 급부상되었다. 자전거 출퇴근 모임이 활성화되었고, 각종 언론에서도 자전거 이용문화 확산을 위한 작업이 이뤄졌다. 고유가가 자전거를 다시 보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앞서 자전거를 조명한 많은 언론에서도 지적되었던 문제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타기란 정말 쉽지가 않다. 기본적으로 자전거를 자전거답게 탈 수가 없다.

 그 대표적인 현장을 지난주 이용했던 도로에서 찾아본다. 아래 언급되는 장소는 평상시 이용할 일이 없어, 정확하게 11개월만에 다시 찾은 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1년 가까이 지났건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이 길은 목포에서 시작해 이곳을 지나, 전주와 중부 지방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지는 1번 국도. 번호가 말해주듯 그 빈번함은 따로 설명을 안해도 될 정도로 대형 덤프 트럭을 비롯해 많은 차량들이 매일 이용하는 사용도 높은 도로다.

 그렇다보니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자전거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 제 15조 2항)에서 정의하고 있 듯, 자전거가 인도를 통행하지 말아야 함에도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함께 사용하기에는 그 위험성이 너무나 커서, 불가피하게(?) 인도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실제로 맘 편히 도로를 이용하고 싶어도 자전거가 다닐 만한 여유 공간은 전혀 없고, 차량의 속도는 자전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험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아니면 쉽지가 않다. 또한, 이 길은 시내 버스 통과 구간이라 정류소 근처에서는 뒤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버스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이렇다 보니 현행법으로는 불법(?)이지만, 인도로 올라가는게 맘 편하다. 그러나 인도에서도 자전거는 환영받지 못한 불청객 일 뿐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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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전용 공간으로만 되어 있는게 흠이지만, 자전거 이용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모습. 모든 길이 이렇다면 문제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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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라고~!!" 1년전과 달리진게 없는 환경. 말로만 자전거 이용 활성화일 뿐, 실제 자전거를 위한 배려는 전혀없는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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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무리를 하기에 아쉬워 아껴둔 건가?" 저런 길이라면 차라리 그냥 속편히 걷는게 낫다.


 비단 이러한 모습은 이 곳만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대부분이 위 구간과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본다. 도로에서는 차에 치이고, 인도에서는 사람에 치이고, 앞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수는 없고... 말로만 자전거 활성화를 부르짓고, 실제는 따로노는 이 비극적인 현실. 책상에 앉아서 볼펜만 굴릴게 아니라, 실제 현장에 나가 확인을 해 보면 진작에 해결되었을 '탁상 행정'의 전형.


 22일 '차 없는 거리의 날 행사'를 가졌던 한 도시에서는 단체장을 비롯해 많은 공무원들이 평상시 관심도 없이 창고에 쳐 박아둔 자전거를 끌고 나와 가식적인 포즈를 취하는데 바쁜 하루를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행사의 순수한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프라 정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현실에서 과연 행사가 먼저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그리고 여전히 자전거가 쇼를 위한 정치적인 도구에 그친다면,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천국의 꿈'은 더욱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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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차도로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위 모습속에서 자전거는 그마나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공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