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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10.25 무한추락
  3. 2008.10.19 전국체전과 추첨
2008. 11. 9. 17:07


부제 : 평균자책점 1위 기념, 광주댐 찾아가기

(방문일 : 2008년 10월 1일)


 김광현(와이번스)과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치열한 싸움 끝에 생애 첫 개인 타이틀을 획득한 윤석민(타이거즈). 요즘에는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 때문에 ‘석민 어린이’로 많이 불리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그의 별명은 ‘광주댐’.

 촌스럽고 억지로 만들어낸 느낌이 강하지만 ‘광주댐’이라는 별명은 지난 2005년 7월 팬 공모에 의해, 더군다나 선수 본인이 직접 뽑아 정해진 자랑스런 별칭이다. (관련 내용 보기) 불펜 투수로 활약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이 별명은 당시 팀의 승리를 지켜달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선발로 자리 잡은 지금은 에이스로써 팀의 마운드를 든든히 지켜달라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광주댐??

 이렇게 맺어진 ‘윤석민’과 ‘광주댐’의 인연. 사실상 이것은 둘의 인연만은 아니었다. ‘광주댐’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 곳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

 실제 이 별명을 응모했던 분이 ‘광주댐’의 존재를 알고 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서울댐, 부산댐, 대구댐, 인천댐 등과 같이 ‘해당 지명+댐’의 합성어 정도로 인식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댐이 탄생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지역에 살면서 ‘광주호’는 들어봤어도 ‘광주댐’은 금시초문이었고, 실제 있다하더라도 과연 그 댐의 규모가 ‘소양강댐’이나 ‘충주댐’, ‘주암댐’과 같이 평상시 친숙한 댐들과 함께 어울리며 불릴만한 규모의 시설이냐의 여부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광주댐’, 진짜 댐 맞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주댐’은 분명 '댐'이었다. 그것도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800여개의 댐에 당당히 포함되는 틀림없는 댐이었다. 다만 그 형태와 목적이 쉽게 떠올리는 댐들과 거리가 멀 뿐.

 물을 막고 있다고 해서 모두 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기준이 있었다. 우리나라 댐 사업의 중심 법률인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는 댐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댐이라 함은 (중략) 높이 15미터 이상의 공작물을 말하며...’. 결국 높이 15m가 넘게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댐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참고 : 사단법인 한국대댐회)

 그렇다면 '광주댐'의 높이는? 15m가 넘는다. 그것도 기준을 훌쩍 넘는 25m. 당당하게 ‘광주댐’이라 불러도 되는 이유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고 높이는 ‘소양강댐’으로 123m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함평 전남야구장 옆의 ‘대동호’를 막고 있는 시설물도 댐이라는 것. 16m의 높이가 이를 증명해줬고, 더 나아가 기록에는 1940년대의 대표적인 댐으로 나와 있었다.

 ‘광주댐’은 어디에?

 광주 동쪽에 있는 ‘광주댐’은 정확하게는 담양군에 위치해 있다. 광주 중심부에서 무등산을 바라봤을 때는 서쪽 끝자락에 ‘광주댐’이 있다고 보면 된다. 그 곳에는 광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광주호’가 있고, 주변에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관광 명소가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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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호 생태공원에서 바라다 본 '광주호'

 찾아가는 법을 통해 이곳의 위치를 확인해보자면 크게 3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광주에서 순천으로 내려가는 국도로 진입한 후 잠시 뒤에 볼 수 있는 고서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식영정, 소쇄원, 가사문학관 방향으로 가는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보면 언덕길 부근에서 ‘광주댐’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이 이 노선을 이용하면 된다.

 다음으로 광주에서 무등산을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광주 동구쪽에서 무등산에 있는 충민사, 충장사, 충효사를 거쳐 광주호로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이 노선을 이용해도 된다.

 마지막으로 화순, 고흥과 같은 일부 남부 지방에서는 화순에서 담양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가는 도중 ‘광주댐’을 만날 수 있다.


  ‘광주댐’은 어떤 곳?

 지금은 모르겠으나 예전 초중등 사회 과목에서 ‘국토종합개발계획’은 단골 시험문제였다. 그래서 달달달 외워야했다. 만약 그 기억이 떠오른다면, ‘광주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2년 정부는 10년간 제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펼친다. 핵심 골자는 전국을 4대강 유역 중심으로 개발한다는 내용. 이 지역에 대입하면 ‘영산강유역종합개발계획’이 그것이며, 대표적 실행 방안으로 댐 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광주댐’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였다.

 이렇게 1974년 3월에 삽을 뜨기 시작해, 1976년 9월 그 모습(높이 25m, 길이 505m)을 드러냈고, 총 공사비는 7억 9천만원(기념비에는 25억 2천 6백만원이라고 되어 있음). 전남 담양군 고서면과 남면에 걸쳐 지어졌으며, 이를 통해 물을 가두면서 광주호가 생겨났다. 참고로 같은 기간 담양호, 나주호, 장성호도 앞에서 살펴본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광주댐은 농업용 수리 시설과 홍수 조절의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변 유명 문화재와 연계되어 관광명소로도 재탄생했다. 참고로 광주호 주변에는 식영정, 독수정, 취가정, 환벽당 등 유명 정자들과 조선 중기 대표적인 정원으로 이름난 소쇄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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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댐’ 찾아가기

 자가용을 이용한다고 했을때 앞서 소개한 위치를 따라 간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가용이 없다고 해서 ‘광주댐’을 못가는 것은 아니다. 대중교통으로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그 비밀은 버스.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댐의 위치가 담양이라 담양터미널을 이용하면 편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무조건 광주에서 가야한다. 물론 담양터미널에서도 갈 수 있지만 편수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마찬가지로 소쇄원이나 광주호 주변도 광주에서 가는것이 편하다.

 그 시작점은 광주 광천터미널. 전국 주요 터미널과 연결되어 있는 이곳으로 온 후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225번(담양운수) 버스를 이용하면 끝. 대략 1시간당 1대가 운행한다. 시내버스처럼 각 정류소마다 정차를 하기 때문에 굳이 터미널까지 올 필요가 없다면 해당 노선이 지나가는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승차를 해도 된다. (참고 : 225번 버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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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에도 광주에서 무등산을 넘어 충민사와 충장사, 충효사 그리고 광주호까지 운행하는 187번(대창운수)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노선은 ‘광주댐’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아서 1시간에 1대가 다니는 버스로 갈아타든지 1시간가량 걸어가야 한다. 대신 광주호에 내려서 앞서 언급한 주변 유명 관광지를 둘러본 후 광주댐으로 향한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참고 : 187번 버스 정보)
 
  이것이 ‘광주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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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댐'이 농부들에게 수확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하듯, 우리의 '광주댐'도 최고 투수로 더욱 거듭나 야구팬들에게 기쁨을 안겨다주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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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보는 윤석민과 김광현의 숨 막혔던 경쟁 ]

 기아 타이거즈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가 열렸던 10월 4일 광주 무등야구장.

 두 팀에게는 이날이 ‘08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였지만, 이미 최종 순위가 확정된 상태라 전날까지만 해도 그들만의 맥 빠진 경기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등야구장에는 6,736명의 관중들이 입장했다. 순위싸움에서 멀어지기 직전인 8월 31일(7,108명) 이후 최다 관중이었다. 왜 이렇게 등을 돌렸던 야구팬들이 다시 야구장을 찾게 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한 선수의 활약 여부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자리잡은 윤석민. 전날 같은 장소에서 김광현(와이번스)이 보여준 호투로 자신이 굳건히 지키고 있던 평균자책점 1위 자리를 빼앗긴 것. 바로 그 1위를 다시 되찾기 위해 어깨 부상으로 개점휴업하고 있었음에도 시즌 마지막경기에 등판했고, 순위싸움에서 뒤쳐지며 멀어졌던 관중들도 힘을 보태기 위해 야구장을 찾은 것이다.

 이 두 선수가 이렇게 치열한 순위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윤석민에게는 프로 데뷔(2005년) 이후 첫 타이틀 획득의 기회였고, 김광현은 최고 투수들만 이룰 수 있다는 투수 3관왕을 위해 이 부문 1위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들의 싸움이 첨부터 치열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도 올림픽 이후 시작된 후반기 첫 경기를 마치고 난 이후까지만 해도 3관왕은 오히려 윤석민이 더 가까웠고, 특히 평균자책점 부문에 있어서는 거의 이변이 없는 한 윤석민 차지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9월 들어 이상한 조짐이 발생했다. 김광현의 호투가 연이어 계속된 것. 9월 3일과 9일 연속 2경기에서 각각 승리투수가 된 것 뿐만 아니라, 합계 15.1이닝 무실점. 다승에서는 단독 1위가 되었고, 순위권 밖(3.09)에 있었던 평균자책점은 어느새 3위(2.74)로 올라섰다. 여기에 그 다음 경기였던 14일에는 비록 승수를 추가하지 못했지만 7.1이닝 1자책점과 무려 11개의 탈삼진을 추가하며, 평균 자책점을 2.66으로 끌어내렸고 탈삼진에서는 2위로 올라서며 어느새 투수 3관왕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반면, 승승장구하던 윤석민의 행보는 김광현과 전혀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후반기 첫 경기 7이닝 무실점 승리투수로 상큼하게 출발했지만, 이후 2경기에서 1패와 9.1이닝 4자책점. 2.34였던 평균자책점이 2.46으로 올라갔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9월 13일 경기 이후 오른쪽 어깨 피로누적으로 선수명단에서 제외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진 가운데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보면, 사실상 올 시즌 마감이었다. 평균자책점 부문도 김광현의 무결점 투구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않는 한 위협받기는 거의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설마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김광현의 어깨가 식지 않았던 것. 9월 21일과 27일 경기에서 2승을 추가하며 사실상 다승왕을 확정지었고, 탈삼진은 1위와 불과 한 개차로 다가섰다. 중요한 것은 13이닝 1자책점으로 평균자책점을 2.50으로 더욱 낮춘 것. 한 달 사이에 정확히 0.59를 낮춘 것이다.

 이어 10월 3일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 펼쳐졌다. 선발로는 마지막 경기를 경쟁자의 팀과 그 홈구장에서 하게 된 것.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7이닝 무자책점. 논란의 2실점이 있었지만, 이는 무자책점이었다. 평균자책점 2.39. 불과 한 달 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여기에 탈삼진도 무려 12개를 추가, 1위로 올라서며 김광현은 그토록 갈망했던 3개 부문 모두 1위로 올라섰다. 이 모습은 모두 윤석민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남아있는 경기는 1경기. 윤석민이 재탈환을 위해서는 3.1이닝 무자책점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최소 경우의 수. 이미 김광현이 상황을 봐서 시즌 마지막 경기 등판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윤석민은 그 이상을 던져야 했다. 부상으로 인해 약 한 달간 실전 감각이 없는 선수에게 상황은 여러모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10월 4일 경기. 하지만 이는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부상으로 한 달을 쉰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씩씩하게 공을 던진것. 그리고 마침내 4회초 선두 타자 유재웅을 투수땅볼로 잡아내며 3.1이닝 무자책점으로 1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의 투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7이닝 무자책점을 기록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평균자책점 2.33. 김광현이 재탈환을 하기 위해서는, 무려 4.1이닝 무자책점을 기록해야할 만큼 던진 것이다.

 결국, 둘의 경쟁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김광현이 다음날 마지막 경기에 나올 수도 있었지만 4.1이닝은 혹사에 가까운 무리한 등판계획이었고, 더구나 팀은 한국시리즈라는 큰 경기를 앞둔 상황이었기 치열한 승부는 여기서 마감되었다. 최종적으로 윤석민은 프로 첫 타이틀인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고, 김광현은 다승과 탈삼진에서 2관왕을 차지하며 올 시즌 프로야구 정규시즌 MVP에 올랐다.
                                                 
           ◎ 윤석민이 '08시즌 마지막 투구를 마치고 내려가는 모습. 이 아웃을 잡아내면서, 평자점을 2.33으로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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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 오늘 석민이가 등판하는 날이란 말이예요~!!


 윤석민이 등판했던 10월 4일, 이날 경기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 하나.

 대체적으로 경기 전 무등야구장 풍경은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몸을 푸는 동안 한쪽에서는 경기 진행 요원들이 내야 그라운드를 정비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선도 긋고 흙 주위에 물도 뿌리고 잔디를 부드럽게 정리를 해주는 작업들 말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경기 30분전에는 이러한 작업들이 모두 완료가 되고 경기 시작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날 무등야구장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이미 그어졌던 선을 지우고, 다시 그렸던 것. 경기 시작을 불과 20여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특히나 흥미로운 건 양 팀 선수단이나 심판진의 요구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경기장을 관리하는 한 직원의 문제제기를 통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사실. 운동장을 관리하는 시 직원들을 다시 불러내 서둘러 선을 다시 긋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조용히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면으로 예전 같았으면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날 모든 대사가 홈플레이트 주변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보니 운동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 직원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이날 윤석민의 등판이 팀 주변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경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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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기 시작 20여분전 갑자기 어디론가 연락을 한다.     2) 시설관리소 직원과 함께 상황 파악
                    3) 문제 확인후 선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작업 돌입        4) 재 점검. "괜찮아?" "문제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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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뿐만이 아니다. 걸레로 홈플레이트를 정성스럽게 닦아내는 모습까지. 지난 '06 준플레이오프때도 보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Posted by 공짜
2008. 10. 25. 18:14



 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젠 웃음밖에 안 나온다. 이런 것을 바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 하나? 포스코, LG전자, 현대중공업이 하한가를 맞고, 현대차와 한전이 장중에 하한가를 찍고, 삼성전자도 하한가 일보직전까지 가는 여태껏 상상할 수도 없었던 모습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은 그저 웃음 뿐.

 며칠 전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고 했던 우리나라 주식 시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문제의 중심지인 미국을 비롯해, 유럽과 남미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까지 전 세계가 모두 동참한 모습이다.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할 정도라 평할 정도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이 위기는 하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점이 큰 문제다.

 우리들이 평상시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릴 때 마음속으로 예상했던 착지점보다 더 밑으로 떨어질 경우 식은땀이 날 만큼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 그 때다. 예상보다 깊은 추락에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투자자들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마찬가지고 정부도 그렇다.



 ● 2008년 10월 24일, '1,000'을 깨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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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자리에서 네 자리로 넘어가는 위치 때문인지, 오래전부터 상징적인 숫자였던 '코스피 1,000'이 10월 24일 무너졌다. 지난 2005년 6월 이후 무려 3년 4개월 만의 일이다. 하지만 그 때와 상황은 정반대다. 2005년의 경우는 대세 상승장에서 고지를 넘어가는 단계였다면, 이번에는 폭락장에서 선을 지키지 못한 채 속절없이 무너진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무려 110포인트가 빠져버리며 1000을 내줬다는 점이 더 큰 충격이다.


 ● 추락의 한 달, 대체 얼마만큼 빠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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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1 - 938 = 563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9월 16일 아침 9시. 우리 주식 시장은 추석 이후 첫 거래일에 충격적인 갭 하락을 맞이한다. 사실상 폭락의 암시였다. 그리고 이어진 '갭 상승-갭 하락-갭 상승'.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시장 참여자들의 혼을 뺀 주식 시장은 이후 9월 25일 1500선 회복을 통한 반등을 보이며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9월 26일부터 그 다음주까지 5거래일 연속 하락 행진. 이후 잠시 갭 상승을 동반한 상승이 있었으나, 이것은 시장을 빠져나가라는 마지막 매도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10월 16일 126포인트 하락. 우리 주식 시장 역사상 최대의 하락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과도한 하락은 여기까지일 것"이라는 분위기였으나, 한 번 시작된 하락 레이스에 브레이크는 없었다. 1년 전 고점 대비 50%선인 1,050을 단숨에 도달한 코스피 지수는 마침내 10월 24일 말도 안 되는 110포인트 하락을 통해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000선을 내주고 말았다. 정확히 한 달 만에 1/3인 563포인트가 빠진 것이다.

 이 기간 전체 21거래일 가운데 외국인은 불과 2일 순매수 우위였고, 기관은 11거래일 그리고 개인들은 무려 15거래일 순매수 우위였다. 이 거대한 폭락에 개인들의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최고점에서 최저점까지' 추락의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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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공포, 공황은 바로 이런 것

 1년 전 10월말 우리나라 주식 시장은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었고, 1년이 지난 현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극도의 공포감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정부나 모든 전문가들도 아니라고 하고 스스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보지만, 위와 같은 지속적인 하락 추세는 IMF 구제 금융 신청 전 위기가 극에 달하던 몇 개월 동안의 모습을 자꾸만 떠오르게 하고 있다. 경험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 MB가 장담하던 3,000은 어디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뒀던 지난해 12월 14일. 당시 이명박 후보는 한 증권사 방문 자리에서 증시에 대해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현재 우리 주가는 저평가되어 있다"면서 "올해 3,000, 임기 내 5,000"을 전망한 것이다. 3,000을 가기위해 올해는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관련 기사)


 ● 추락은 어디까지?

 24일 폭락에 충격을 받은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25일 아침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날아온 소식에 또 한 번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간밤에 미국 다우지수가 3.59%인 312.30포인트 폭락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전 세계가 폭락한 마당에 위기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염치없게 오를 수는 없었던 것.

 예전에는 미국이 오르면 다른 국가들이 따라 오르고, 미국이 떨어지면 같이 떨어지는 양상이었으나 이제는 미국이 제 앞가림하기 힘든 상황에서 미국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도 떨어지고 미국 역시 덩달아 떨어지는 모습이다. 이렇다 보니 서로가 눈치를 보면서 폭락이 폭락을 부르는 양상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지난 고점 대비해서 50% 이상 하락했다. 우리의 고점은 지난해 11월 1일 2,085.45였는데, 올해 10월 24일 종가는 절반(1042.725)이 훨씬 넘는 938.75가 됐다. 일본 니케이 지수도 마찬가지다. 최고점은 지난해 2월 26일 18,000.39였으며, 24일 종가는 7649.08이었다. 절반인 9150.195를 이미 넘어섰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지난해 10월 11일)를 최고점(17,488.97)으로 잡아도 절반인 8744.485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런 기준으로 봤을 때, 미국의 다우지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아직 덜 빠졌다는 이야기다. 다우의 최고점은 지난해 10월 11일 14,198.09였다. 25일(한국시간) 종가는 8378.95. 최고가 대비 절반은 7099.045인데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279.905가 더 하락해야한다. 그러니까 25일과 같은 3%대 하락이 3번 연속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지난 10월 10일 7.882.50에서 저점을 기록했지만 이는 안착이 아닌 장중 터치일 뿐이었다. 형평성으로 따져본다면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안착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 그 만큼 더 빠지게 된다면 우리 지수 역시 추가적인 하락이 불가피 하다는 점이다. 물론 빠질 만큼 빠졌다는 생각에 우리만 독자적으로 나가기를 희망하겠지만, 이미 전 세계가 동조화 되어 있는 마당에 그럴 확률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더 이상의 하락을 멈추고 옆으로 횡보하는 것은 지금까지 고통 받은 투자자들의 피를 말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강한 V자 반등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 모습보다는 지금과 같은 하락 패턴의 고통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그 때까지 인내는 불가피해 보인다.




 




    나....
 
    그대 싫었지만 선거 결과 담담히 받아들였고,

    '어린쥐'와 '강부자', '고소영' 있었지만 TV로 취임식 보면서 인정해줬고,

    '7-4-7'과 '주가 3,000, 5,000' 호언장담에 주식 투자해 줬을 뿐이고,

    하지만 지금 그 돈 절반 날아갔고.....

    더 이상 넣을 돈도 없고..................


    주식하면 엄마가 다리 몽댕이를 뿌러뜨린다고 했고

    엄마 보고 싶을 뿐이고... 엄마~~~~~~~~~~~



    성질이 뻗쳐서 정말 XX








 하지만 모든 책임을 누구한테 돌릴 수도 없는 일. 모든 게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소로이다. 따끔한 한마디 부탁해요.


                                                                          예...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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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펌 영상' 한 편 감상하자. (출처 : http://eniac90.egloos.com/)


                 케이크를 내리찍는 아저씨 표정에서 뒤집어짐... 아~~ 탐욕과 번뇌야 사라져라~~~~~~~ ㅠㅠㅠㅠㅠ




Posted by 공짜
2008. 10. 19. 00:46




 상무(전남)와 성균관대(경기)의 전국체전 야구 일반부 준준결승전이 열린 14일 여수 진남야구장.

 성균관대가 대학 강호지만, 대부분이 프로 출신으로 구성된 상무의 우세를 점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예상이었다. 실제로 두 팀은 지난해 이 대회 결승에서 만나 상무가 성균관대를 가볍게 꺾고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년만의 재대결. 상무가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상은 경기 초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성균관대가 예상을 뒤엎고 2회초에 대거 5득점을 한 것. 한 두 점도 아니고, 대거 5점 헌납은 상무에게 치욕적인 일. 관중석에서도 '너네가 프로선수들 맞냐?'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난이 계기가 된 것일까? 상무는 한 점, 한 점씩 꾸역꾸역 성균관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9회말. 여전히 동점을 만들기에는 1점이 부족했던 1사후 상황. 타석에는 라이온즈 시절 안타수보다 도루수가 더 많았을 정도로 빠른 발이 주특기였던  ‘발명구’ 강명구가 들어섰다. 그리고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이어졌다.  성대 마무리 황재규를 상대로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극적인 동점 1점 홈런을 친 것. 초반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관중들도 어느새 전남을 대표한 상무 선수들을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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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홈런을 허용한 황재규(이글스 입단 예정)는 지난해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9회초 김지수(히어로즈 입단 예정)에게 동점 홈런을 내주며 팀원들에게 추첨의 스릴을 안겨다 주었는데(관련 글 보기), 1년 만에 또 다시 그 장면을 재연하고 말았다.

 경기는 결국 5-5로 정규이닝을 마쳤고, 이제 남은 것은 연장전이 아닌 추첨. 전국체전에서만 볼 수 있다는 독특한(?) 승부 결정 방식으로, 이 세상 어느 야구 경기에서도 볼 수 없는 놓칠 수 없는 명장면(?)이 펼쳐졌다.

 양 팀 9명의 선수가 나선 추첨식은 초반 상무의 우세 분위기가 엿보였으나, 운은 성균관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결과는 7-2로 성균관대의 승. 천신만고 끝에 대회 4연패를 노리던 대어를 낚은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추첨승의 행운과 함께, 비록 추첨이지만 1년 전 결승패 설욕의 기쁨까지.

 결국, 강력한 우승 후보를 잡아낸 성균관대는 상승 분위기를 준결승(경남대)과 결승(건국대)전까지 이어가며 상대를 각각 물리치고, 제89회 전국체전 야구 일반부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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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첨 결과 확정 후 성균관대 이연수 감독과 선수들이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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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 진남야구장 ]


 ◆ 추첨의 시작

 전국체전 야구에서 최초의 추첨이 등장한 것은 제39회 대회가 열린 1958년이다. 대한체육회 역대체전정보(관련 페이지)를 살펴보면, 고등부 산하 ‘중등부 연식’ 부문 준결승에서 동인천중(경기)이 대신중(경남)과 3-3 무승부를 이룬 후, 추첨을 통해 승리했다는 내용이 사상 최초의 추첨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정식 종목이 아닌 연식 부문이고, 소년체전으로 분리가 이뤄진 중등부에서 나온 기록이라 현재 기준에 맞춰보면 사실상 최초 추첨은 1966년 제 47회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일반부의 해병대(경북)가 준결승에서 한전(부산)을 추첨으로 물리친 것.

 이후에도 주로 연식 경기에서만 볼 수 있었던 추첨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56회 대회부터 현재까지 거의 빠지지 않는 장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최근 70회부터 이번 89회 대회까지 추첨이 없었던 적은 73회 단 한번뿐이었다. 그 결과 이번 대회까지 고등부에서는 모두 44차례, 일반부에서는 47차례나 추첨으로 양 팀의 희비가 엇갈리게 되었다.


 ◆ 추첨의 전설들

 이번 대회 고등부 준준결승에서 용마고(경남)를 추첨으로 물리친 천안북일고(충남)는 이 승리로 인해 좀처럼 보기 드문 기록을 잇게 되었다. 그것은 추첨 7연승. 무려 7번의 추첨 상황을 만들기도 힘든데 거기다가 백전백승의 놀라운 신화를 쓴 것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11전 8승 3패. 추첨만 놓고 본다면 일반부를 통틀어서 어느 팀도 근접하기 힘든 놀라운 성적이다. 가히 ‘추첨의 신’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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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천안북일고가 추첨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첫 추첨은 61회(1980년) 대회. 당시 예선에서 선린상고를 만나 팀 사상 첫 추첨을 경험하지만 결과는 패. 이후 64회까지 매번 참가 때마다 추첨과 마주쳐야 하는 특이한 경험이 이어지게 되는데, 63회 결승전에서 군상상고를 추첨으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외에는 모두 패배의 아픔. 4전 1승 3패.

 이렇게 암울한 1980년대를 보낸 천안북일고는 1990년대에 접어들자 추첨 앞에서 전혀 새로운(?) 팀이 되어 있었다. 그 시작은 72회(1991년) 대회. 강릉고에 추첨승을 거둔 것이다. 7연승의 시작이었다. 이후 74, 81회 각 대회에서 무려 2번의 추첨승을 연거푸 거두는 설명하기 힘든 놀라운 모습이 이어졌다. 그리고 올해, 81회(2000년) 이후 오랜만에 추첨식 앞에 다시 선 천안북일고는 추첨의 강자답게 승리를 거둬 연승을 7로 늘렸다.

 이외에도 앞선 천안북일고와의 패배만 빼고는 5전 전승을 거둔 군산상고, 4승 무패의 광주일고, 3승 무패의 대구상고 등이 고등부 추첨에서 두각을 보인 팀들이었다. 일반부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경남대가 4전 전승의 눈에 띄는 기록을 보였고, 인하대(4승 2패)와 원광대(3승 2패) 정도가 추첨과 인연을 보인 팀들이었다.

 ◆ 상무, “추첨 싫다, 정말 싫어”

 앞 결과에서도 봤지만 이번 대회 일반부에서는 이변이 발생했다. 대회 4연패를 노리던 강력한 우승후보 상무가 탈락한 것이다. 상무의 고전이 1차적인 원인이었지만, 탈락의 직접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추첨’.

 그런데 상무가 추첨으로 짐을 싸야했던 적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상무라는 이름으로 참가(65~69회는 열람 오류로 미확인)를 시작한 70회(1989년)부터 이번까지 상무는 모두 13번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가운데 3번 우승했고 10번 중도 탈락했는데, 무려 절반에 가까운 4번이 ‘추첨패’로 인한 결과였다. 특히 80회(1999년) 이후는 ‘모 아니면 도’식이다. 6번 참가해서 3번 우승했고 3번 탈락했는데, 그 3번이 모두 ‘추첨패’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무처럼 전체적으로 일반부 팀들 중에서 추첨의 불운에 뒤돌아선 팀들이 많았던 가운데, 계명대의 5전 전패와 3승 5패의 영남대, 그리고 초대 추첨패 팀이자 지금은 해체된 1승 3패의 한전이 가장 큰 패배의 쓴맛을 맛본 팀으로 나타났다. 고등부에서는 1승 5패의 부산고가 단연 눈에 띄었다.

 ◆ 추첨의 행운은 한 순간

 추첨으로 접어들게 되면 객관적인 지표는 필요가 없어지고, 승부의 방향은 오로지 하늘의 뜻에 맞겨야 할 만큼 그날의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일까? 추첨승을 거둔 팀들의 행운은 대부분 다음 경기로 이어지지 못하고, 1회성에 그치고 말았다.

 전국체전에 나온 추첨을 모두 분석해 본 결과, 결승전 이전까지 추첨으로 승리를 거둔 팀들은 대부분 다음 경기에서 패하며 짐을 싸야했다. 구체적으로 고등부는 다음 경기에서 패한 경우가 19번이었던 반면, 승리를 거둔 경우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7번에 불과했다. 일반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17번 패를 기록하는 동안 승리는 1/3 정도인 6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결승전까지 진출했을 경우에는 고등부와 일반부가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 일반부의 경우는 여전히 ‘1회성 법칙’이 적용되며, 준결승 이하에서 추첨승을 거두고 결승까지 올라왔어도 대부분은 무릎을 꿇었다. 결승에서 승리를 거둔 경우가 6번 밖에 되지 않았고, 오히려 패를 기록하며 준우승에 그친 경우가 무려 3배인 18번에 이르렀다. 특히 이 가운데 준결승에서 추첨승을 기록한 11번의 경우에서 우승까지 이어진 경우는 단 한번(64회 동아대) 뿐이었다.

 반면, 고등부의 경우는 일반부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였다. 패배를 기록하며 준우승에 그친 것이 6번인데 비해,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 경우가 무려 2배인 12번에 달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부와 정반대로 준결승에서 추첨승을 거둔 6번의 경우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경우는 단 한번 이었다.

 ◆ 기타 주목할 사항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추첨의 달인’ 천안북일고는 74, 81회 각 대회에서 무려 2번의 추첨에 맞서 모두 이겨버린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한 대회에서 2번의 추첨승을 거둔 경우는 이외에도 3번 있었다. 53회 고등부의 대구상고와 79회 고등부 군산상고와 일반부 현대전자가 추첨으로만 2승을 거둔 것이다. 이 가운데 74회 천안북일고와 함께 2승의 행운이 우승까지 연결된 경우는 79회 군산상고 밖에 없었다.

 이번 대회 일반부 우승을 차지한 성균관대는 두 대회 연속 추첨의 스릴과 함께, 모두 승리를 거두는 행운까지 차지했다. 이런 사례는 주로 일반부에서 많이 나왔다. 원광대(74, 75회)를 시작으로 동의대(82, 83회), 경남대(83, 84회) 그리고 인하대(84, 85회)가 쉽지 않은 행운을 거머쥔 팀들이다. 이 중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동의대(82회)와 원광대(84회) 뿐이었다. 고등부에서는 광주일고(77, 78회)만이 유일하게 기록했고, 77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추첨의 전설’ 천안북일고는 양쪽 부문을 통틀어 유일한 3개 대회(62~64회) 연속 추첨을 경험했다. 하지만 결과는 1승 2패로 저조.

 체전에서 추첨의 한계는 없다. 결승전에서도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결승전 추첨은 63회(1982년) 고등부에서였다. 천안북일고와 군산상고가 2-2 무승부를 이뤄 추첨으로 천안북일고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70회 일반부에서 경남대가 단국대를 같은 방식으로 물리쳤고, 75회 고등부에서 부천고가 대전고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다행인 것은 이외에 더 이상의 결승전 추첨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 추첨은 언제까지?

 “이제 연장전이네?”

 9회말 상무 박병호의 타구가 유격수 땅볼로 이닝이 마무리되자 한 관중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펼쳐진 광경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경기가 이어져야 할 운동장에 느닷없이 책상이 들어오고, 양 팀 선수들은 그 책상을 중심으로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 연장전 대신 추첨으로 승부를 가르는 체전만의 독특한(?) 경기 방식을 몰랐던 것이다.

 이내 추첨으로 승부가 가려지고 자리를 뜨는 관중들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뭐 이런게 다 있어?” 마지막까지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경기 뒤에 나온 허무한 승부 결정 방식에 대한 허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추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일주일간의 짧은 대회기간 때문이다. 여기에 일부 경기장을 제외하고는 야간 경기를 할 수 없는 열악한 경기장 사정과 선수층이 얇은 것도 추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타까운 사정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방적인 추첨에 변화를 줘야할 때다. 최소한 몇 이닝 정도는 연장전을 해보고 추첨으로 넘어간다거나, 아니면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처음 등장했던 승부치기와 같은 제도라도 도입해서 야구를 통해 승부가 결정 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그들만의 대회'가 아닌 지켜보는 관중이 있다는 점에서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음 대회부터 제도 개선을 통해 선수들도 아쉽지 않고, 관중들도 아쉬움속에 발길을 돌리지 않는 좋은 방법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Posted by 공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