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5. 01:25
2006년 4월 12일


[이강철 선수 특집 1 : 누구?]

작년 이맘때였다. 시즌 초반부터 불혹을 앞둔 나이에도 마당쇠처럼 매 경기 투입이 되며, “야구를 나이로 하냐”며, “앞으로 2~3년은 더 현역에서 뛸 자신이 있다”고 기염을 토하던 이강철(40) 선수가 우천으로 인해 예정보다 하루 늦은 4월 12일 두산 베어스와의 광주 홈 개막전 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지며 정들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PART I
1부 : 이강철 선수 이력과 기록 정리
2부 : 이강철 선수에 대한 키워드
3부 : 이강철 선수의 프로 생활 다시 보기

PART II
1부 : 이강철 선수, 그의 라이벌
2부 : ‘공짜’가 선정한 최고의 경기

 


[[[[[[[[[[[[[[[[[[[[[[<< 1부 : 이강철 선수 이력과 기록 정리 >>]]]]]]]]]]]]]]]]]]]]]]

 

이강철(1966년 5월 24일 광주 生), 키:180cm, 체중:79kg, 혈액형:A형

■ 이력
1982년 : 광주일고 입학
1985년 : 동국대학교 입학
1988년 : 서울올림픽 야구 대표팀
1989년 : 해태 타이거즈 입단(신인 1차 지명)
1991년 11월 : 한일 슈퍼게임 대표
1999년 11월 :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FA 3년간 8억원)
2001년 7월 :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현금 2억) - 기아 타이거즈
2003년 10월 :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 야구 대표팀
2004년 11월 : 기아 타이거즈 계약, 두 번째 FA(1년 계약), 계약금 1억 원, 연봉 2억 원
2005년 10월 : 기아 타이거즈 투수코치
2006년 4월 12일 : 정식 은퇴식(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 두산 베어스 전)

■ 개인 기록
1998년 7월 29일 10년 연속 세 자리 탈삼진(대전 한화 전)
1998년 8월 9일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달성(대구 삼성 전)
1998년 9월 17일 프로 최초 250경기 선발등판(광주 한화 전)
2002년 8월 2일 프로야구 통산 2000이닝 투구(광주 SK 전, 통산 두 번째 기록)
2004년 5월 13일 프로야구 통산 개인 최다 탈삼진(1699개) 기록 수립(광주 현대 전)
2004년 8월 13일 프로야구 통산 2번째 150승 달성 (사직 롯데 전)

■ 프로 통산 전적
○ 152승 112패 53세이브(최다승 역대 2위)
○ 602 경기 출장
○ 2204.2이닝(역대 2위)
○ 1749삼진(역대 2위)
○ 65완투(역대 4위), 18완봉승(역대 5위)

■ 개인 수상 기록
1990년 시즌 다승 3위
1992년 최다 탈삼진(155개) 투수
1992년 시즌 다승 2위, 승률 5위
1996년 한국시리즈 MVP
1997년 시즌 승률 2위

■ 기타 기록
○ 최다 1안타 완봉승(1990년 삼성 전, 1997년 한화 전, 1998년 OB 전, 역대 1위)
○ 3년 이상 200이닝 투구(1990~1992년, 역대 2위)
(참고) 5년:정민태(현대.1996~2000년)
2년:정민철(한화.1996~1997년), 주형광(롯데.1995~1996년), 리오스(두산,2004~2005년)

 

[[[[[[[[[[[[[[[[[[[[[[<< 2부 : 이강철 선수에 대한 키워드 >>]]]]]]]]]]]]]]]]]]]]]]

 

이강철 선수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야구 선수답지 않은 잘생긴 외모?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 하지만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이런 경기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그가 마운드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 이강철 선수는?
▲ 홈런공장 공장장
그는 삼진은 많이 잡아냈지만, 타자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공을 던지는 잠수함 투수라는 특성으로 인해 데뷔 초부터 각 팀 홈런 타자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다. 특히, 데뷔초에는 같은 언더 핸드 투수인 한희민 투수와 함께 누가 과연 홈런 공장장으로 등극할 지가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 기록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홈런을 허용한 타자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강철 선수와 같이 2005 시즌이 끝나고 유니폼을 벗은 김기태 선수는 1991년 이강철 선수로부터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뽑아냈다. 그는 국내 최고의 파워와 정교함을 겸비한 최고의 교타자라는 찬사를 들었던 선수였는데, 그 홈런의 영향 때문인지 1994년 좌타자로는 최초로 홈런왕에 등극하게 되었다.
또한, 국민 타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승엽 선수도 1995년 5월 경기에서 그로부터 데뷔 첫 홈런을 빼앗아 갔다. 특히 타자와 투수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이 홈런 한방은 타자로서의 자신감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 잠수함 투수의 대명사 - 원조 핵잠수함
야구팬들 사이에 ‘최고의 투수가 누구 인가?’라는 질문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소재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유명한 야구 게시판 등에서 ‘어떤 투수가 최고의 투수라더라’며 글을 올리면 최고의 조회수와 함께 바로 바로 댓글이 달리며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기가 일쑤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잠수함 투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프로야구 유일한 10년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기록하며 최다승 기록에서도 152승을 기록한 이강철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은퇴식과 함께 이강철 선수와 같은 해 유니폼을 벗은 기록의 사나이 장종훈선수도 은퇴를 하면서 선수생활 중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로 주저없이 이강철 선수를 꼽았다.

▲ 성실함의 대명사
아무래도 그 의 성실함은 기록이 말해준다.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데뷔 첫 해 15승8패 5세이브를 시작으로 데뷔 후 4년 연속 15승, 10년 연속 두 자리 승수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연속 기록들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 선수도, 통산 최다승의 송진우 선수도 이루지 못한 달성하기 힘든 기록이었다.

 

[[[[[[[[[[[[[[[[[[[<< 3부 : 이강철 선수의 프로 생활 다시 보기 >>]]]]]]]]]]]]]]]]]]]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그를 보고 2인자라고 한다. 마치 정치판에서 어느 노 정치인이 자신과 손을 잡았던 모든 후보들을 대통령으로 이끌었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자 그를 ‘영원한 2인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강철 선수도 그러한가?

최고의 투수 선동렬 선수의 룸 메이트로써,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최고의 선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좋은 후배의 역할을 했던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기록적인 측면에서 지금도 최다승 기록과 투구에 관한 모든 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는 송진우(한화 이글스) 선수에 이어 최다승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때 다승과 탈삼진 부문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1, 2위를 다투었지만, 지금은 모든 부문에서 2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인자 이다 보니 상복도 따라오지 않았던 걸로 유명했다. 은퇴 할 때 마저도 그 누구에게 뒤쳐질 것 없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바람에 쓸려가 듯 조용히 은퇴가 발표되었다. 우승의 기쁨도 수없이 맛보며, 그 자신 스스로 팀의 우승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2인자로 기억되고 있다.

과연 그의 17년간의 선수 생활은 2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보자.


■ 해태 타이거즈 미래 3총사의 일원으로서 고향팀에 입단하다
그는 광주일고와 동국대학교를 거치며 가는 곳마다 팀을 우승시키는 화려한 아마추어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1988년 올림픽으로 인해, 그 어느 해보다 뛰어난 신인 선수들이 무더기로 입단한 1989년 해태 타이거즈에 주목을 받으며 입단을 했다. 특히 조계현(군산상고-연세대), 이광우(군산상고-원광대) 선수와 함께 국가대표 3인방 중 한명으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타이거즈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그는 첫해부터 36경기에서 15승(8패)에 방어율 3.23을 기록하며 137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이듬해에도 2년차 징크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16승(10패)에 방어율 3.14를 기록하며 165개의 삼진을 기록 하는 등 신인 시절보다 더욱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막강한 해태 타이거즈 선발진의 없어서는 안 될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연도 소속 게임 - 승 -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89 해태 36 - 15 - 8 - 5 - 137 - 3.23 - 195.1
1990 해태 44 - 16 -10 - 5 - 163 - 3.14 - 220.2


■ 2인자로서 묵묵히 기록을 쌓아나가다
신인 시절부터 기복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꾸준한 기록을 세우던 그였지만, 정작 크게 대접은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같이 입단한 조계현 선수도 그 못지않은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다이내믹한 투구폼과 화려한 구질로 인해 그는 많은 타이거즈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 보다 더한 큰 벽이 있었으니 ‘국보급 투수’ 선동렬 선수가 버티고 있었다. 특히, 그 시기 선동렬 선수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투수 주요 3개 부문의 상을 3연패 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강철 선수는 이런 그들의 활약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만의 기록을 써 내려 갔다. 그리고 조계현 선수는 물론이고, 최고의 투수 선동렬 선수도 해내지 못한 10년 연속 두자리 승수 및 10년 연속 세자릿수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낸다. 이 기록은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기록이다. 이런 대기록 달성을 위해 그는 소리 소문없이 꾸준히 기록을 쌓아가고 있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91 해태 36 - 15 - 11 - 3 193 3.19 214.2
1992 해태 33 - 18 -- 9 - 0 155 3.44 217.1
1993 해태 31 - 10 - 10 - 1 131 3.04 154.0
1994 해태 33 - 12 - 15 - 1 140 3.64 185.2
1995 해태 29 - 10 - 10 - 1 126 3.30 150.0


■ 타이거즈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다
1995년 시즌이 끝나고 해태 타이거즈에는 일대 변화가 생긴다. 팀 내 기둥 투수인 선동렬 선수가 시즌이 끝나고,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을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은 선동렬 선수가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이 벌벌 떨게 만드는 반사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다음 시즌부터 시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팀은 1993년 이후 무려 3년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그 다음해에도 우승 차지하는 등 2연패를 이루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강철 선수가 있었다. 그는 선동렬 선수가 빠져나간 공백을 훌륭히 메우며 선배인 김정수 , 조계현 선수와 함께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또한, 이대진, 故 김상진 선수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잘 리드하면서 선동렬 선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결국, 그는 1996년 한국 시리즈 MVP를 차지하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8년에는 무려 7년만에 15승 이상의 승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96 해태 28 - 10 - 9 - 1 119 - 2.46 153.2
1997 해태 30 - 11 - 3 - 2 128 - 2.99 162.2
1998 해태 31 - 15 - 11 0 160 - 3.11 179.1


■ 잠깐의 외도와 복귀
1999년 이강철 선수에게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최대의 시련기가 찾아왔다. 데뷔이후 큰 부상한번 없이 한해도 거르지 않고 두 자릿수 승리를 챙겨왔던 그가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고 수술이후 재활에만 매달린 것이다. 이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는 한 시즌을 쉬어야 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FA(자유계약)제도가 신설되면서 첫 번째 혜택을 받는 수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환경에서 운동을 시작하려는 마음으로 2000년 삼성과 8억원의 대박 계약을 이끌어내며 늦은 나이에 팀을 옮기는 과감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저하된 구위와 코칭스태프와의 불화 등이 겹치며 삼성 라이온즈에서 자리를 잡지 목하고 단 1승만 거둔 채 2001년 7월말 해태 타이거즈로 복귀를 한다(복귀 첫 경기는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안타깝지만 실패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복귀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며, 중간과 마무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 해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1999 해태 ------- 시즌 결장 ----------
2000 삼성 14 - 1 4 - 0 - 20 - 7.30 37.0
2001 기아 27 - 2 3 - 1 - 50 - 6.91 56.0
2002 기아 66 - 5 2 - 17- 97 - 3.17 105.0
2003 기아 67 - 6 4 - 9 - 57 - 1.98 68.1

 

■ 아쉬운 선수 생활 말미
그 이름답게 강철 같은 어깨를 자랑하며, 평생 선수 생활을 할 것 같았던 그도 선수 생활 말미가 찾아왔다. 기아 타이거즈 팬들로부터 조차도 “이제 이강철도 다 됐구나..”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된 것이다.
그 계기는 광주에서 펼쳐진 2004 시즌 두산 베어스와의 준 플레이오프 경기였다. 1승으로 두산 베어스가 상대 전적에서 앞선 가운데, 2차전 경기는 연장 11회까지 무승부가 이어지며 반드시 2승을 거둬야 하는 규정상, 잠실에서 3차전 승부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신용운 선수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이강철 선수는 연장 12회초 만루 상황에서 홍성흔 선수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하며, 우승에 대한 꿈을 접게 만들었다. 한편, 앞선 1차전에서도 안경현 선수에게 승부에 쐐기를 박는 3점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진데 이어 2차전에서도 중요한 순간 만루 홈런을 허용하자 여기, 저기에서 그의 선수 생활 지속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강철 선수는 선수 생활의 기로에 놓인 이 시기에 이대로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시즌이 끝나고 구단과 재계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한 2005 시즌 초반 3경기까지 성적이 2개의 홀드에 방어율 1.35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예상치 않게 팀이 연패에 빠지며 꼴찌로 내려앉고, 그 자신마저 16경기에나 등판하며 팀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투구를 할 정도로 체력 저하를 호소하며 5월 중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컨디션 회복 후 다시 복귀할 것으로 보여졌지만, 나아지지 않는 팀 성적으로 인해 점점 그의 설자리가 없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젊은 투수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한달 후 복귀한 롯데 자이언츠와의 부산 경기에서 이대호 선수에게 큼지막한 3점 홈런을 허용하고, 6월 29일 SK 와이번스와의 광주 경기에서는 상대한 두 타자 모두에게 안타를 내주며, 상대의 주루사로 인해 간신히 이닝을 마무리 지으며 마운드를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기가 17년 프로생활의 마지막 경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은퇴 경기와 은퇴식은 고사하고, 은퇴 발표에 대한 정식 기자 회견도 없이 그는 유니폼을 벗었다.

연도 소속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2004 기아 79 - 6 2 - 7 - 56 - 2.95 85.1
2005 기아 18 - 0 1 - 0 - 15 - 3.20 19.2


■ 새로운 그의 인생 -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
그는 기아 타이거즈와 자매 결연을 맺은 미국 프로야구 미네소타 트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기 위해 작년 말부터 준비를 마치고, 올해 초부터 이미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지난 2월 15일 미국으로 출국해서 3월초까지 기아 타이거즈의 플로리다 훈련 캠프에 합류한 뒤 3월 8일부터 본격적인 연수 생활을 시작했다.
4~5월 두 달 동안은 미네소타 산하 루키리그 팀에서, 6월에는 싱글A팀 미러클에서, 7월에는 더블A팀 뉴브리튼에서, 그리고 8월에는 트리플A팀 로체스터에서 단계적으로 레벨을 올려 연수를 받게 될 예정이다.

아직은 팬들이나 본인 스스로 코치라는 직함이 낯선 상황이다. 아쉽게 선수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성공 여부에 우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선수시절 항상 훈련과 노력, 성실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지 않았는가? 가르친다는게 어려운 일인것은 분명하지만, 항상 후배 선수들에게 맏형 같은 존재로서 귀감이 되어 왔기에, 지도자로서도 최고의 위치에 오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타이거즈 투수 코치로 다시 무등 경기장 마운드에 오르는 그날을 기다려 보겠다.

연도 게임 승 패 세이브 탈삼진 방어율 이닝
통산 602 152 112 53 - 1749 3.29 2204.2

 


[ 글을 마치며... ]

원래 예정대로 라면 4월 11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광주 지방에는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경기는 취소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은퇴식도 하루 뒤로 연기되었다. 하루라도 일찍 그를 떠나보내기 싫은 팬들의 마음이 하늘까지 전달이 된 모양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강철 선수...

Posted by 공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