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5. 01:24
2006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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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철 선수, 그의 라이벌

① 한희민 (빙그레 이글스-삼성 라이온즈, 1986~1993)

그가 프로에 입단했던 1989년은 잠수함 투수들이 봇물을 이루던 시기였다. 중고 신인으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1988년 올림픽을 마치고 입단한 대어급 신인 선수들을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한 박정현(태평양-쌍방울) 선수가 있었으며, 재일 동포 출신으로 모든 경기에서 완투에 가까운 투구를 선보였던 김성길(삼성-쌍방울) 선수도 있었고, 내 놓으라 하는 OB 베어스 투수진에서 에이스 노릇을 했던 김진욱(OB) 선수가 있었다. 이 외에도 1988년 신인왕 이용철(MBC-삼성) 선수와 박동수(롯데), 김청수(롯데) 선수 등등 각 팀에서 선발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와 쌍벽을 이루며 최고의 잠수함 투수자리를 다투던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희민(빙그레) 선수다. 둘은 공통점도 있다. 앞에 열거한 선수 중에서 박정현 선수를 제외하고는 사이드 암 스로우 투수지만, 둘은 정통 언더 핸드 투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두 선수는 ‘홈런 공장 공장장’이라는 불명예 직함도 같이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선수는 개인이나 팀으로나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발전을 해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해태 타이거즈와 빙그레 이글스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갔다. 자연스럽게 두 선수는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라이벌로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성적에 있어서 라이벌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다.

 

② 선동렬 (해태 타이거즈-주니치 드래곤즈, 1985~1999)

기록으로만 놓고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충분히 라이벌이라는 수식을 붙이고도 남는다. 이강철 선수가 최고 투수로 기억되는 그에 비해 승리도 더 많이 했고, 삼진도 더 많이 잡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강철 선수 본인은 그런 관계를 거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선동렬 선수의 최다 탈삼진 기록을 경신한 직후 인터뷰에서도 “좋아하는 후배가 기록을 달성했으니, 기쁘게 생각해 달라”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89년 이강철 선수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국보급 투수’ 선동렬 선수와 룸메이트가 되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이강철 선수는 그에게 투수로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수업이 선동렬 선수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1995년까지 7년 동안 이어졌다. 최고 투수였던 그를 만난 건 이강철 선수로서는 프로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③ 조계현 (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 1989~2001)

조계현 선수는 팀의 마스코트 호랑이답게 포효할 줄도 알고,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지녀 타이거즈 팬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선수였다. 반면, 이강철 선수는 곱상한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격에다, 조용조용한 성격을 가진 선수였다. 홈런을 많이 맞긴 했지만, 삼진은 그 어떤 투수 보다 많이 잡아냈다. 하지만, 포효하기 보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모자를 만지는 선에게 그의 기쁨을 표출할 뿐이었다. 이렇게 두 선수는 크게 대비 되는 스타일을 지닌 선수였다.
투구 스타일도 대비되었다. 이강철 선수는 언더 핸드 투수치고는 빠른 공을 던지고, 삼진도 많이 잡는 등 잠수함 투수 그 이상의 공격적 투구를 했지만 크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구속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빠른 공과 ‘팔색조’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다양한 변화구 구사 능력을 가지는 조계현 선수는 타자를 향해 더욱더 공격적 투구스타일로 윽박질렀다. '싸움닭'이라는 그의 별명이 그 사실을 대변해 준다.

 


④ 송진우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9~현재)

참으로 복잡한 관계다. 때론 라이벌이었다가 협력의 관계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두 선수는 출생 연도가 같고, 입단 동기이다. 하지만, 이강철 선수는 송진우 선배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같은 1966년생임에도 빠른 1966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진우 선수가 동국대학교 84학번이고, 이강철 선수는 85학번이다. 그럼에도 다시 입단 동기가 된 것은 서울 올림픽 참가로 인해 입단을 1년 늦췄기 때문이다.

● 첫 번째 만남 - 운명의 시작
둘의 만남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광고 3학년이었던 송진우 선수와 광주일고 2학년 이었던 이강철 선수가 1983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만난다. 그리고 문희수(해태) 선수의 활약으로 광주일고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 들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 두 번째 만남 - 후배가 되다
그 들이 다시 만난 곳은 동국대학교에서였다. 당시 동국대는 김인식(현재 한화 이글스 감독) 감독을 영입하고 난 뒤에, 대학교 무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1985년 고교 동창 박준태(태평양-LG) 선수와 함께 85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그 곳에는 1년 선배 송진우 선수가 미리 입학해 있었다. 하지만, 1984년 대통령기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송진우 선수는 이강철 선수가 입단한 그 해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신입생인 그에게 공을 넘기고 주로 타자로 뛰어야 했다. 마운드에서 에이스 역할을 담당한 이강철 선수는 동국대를 대학 최강으로 이끌며 주목을 끌었고, 송진우 선수는 이 시절 어깨를 쉴 수 있어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중에 밝혔다.
이렇게 대학교 무대를 평정했던 이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야구 대표팀에도 나란히 선발되어 국가대표로 활약하게 된다.

● 세 번째 만남 - 냉정한 프로 세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이강철 선수는 연고지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되어 조계현, 이광우 선수와 함께 입단하게 된다. 한편, 송진우 선수도 연고팀인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게 되고, 이때부터 다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당시 해태와 빙그레는 최강의 전력을 뽐내며 페넌트레이스와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을 다투던 팀이었다. 이런 팀에 나란히 입단하게 되었으니, 경쟁관계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강철 선수는 ‘투수 왕국’ 해태 타이거즈 선발진에 이름을 올리고, 신인 시절부터 최고의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첫 해 15승8패 5세이브를 기록한 이후, 4년 연속 15승과 10년 연속 두 자리 승수의 위업을 세운 것이다. 송진우 선수도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투입되어 강속구를 뿌렸다.

그리고 프로의 비정함을 맛볼 수 있는 첫 사건이 1992년 시즌 종료를 앞둔 9월 17일과 18일 벌어졌다. 당시 두 선수의 승수는 똑같은 18승. 다승 공동 1위였다. 남은 경기는 2경기. 두 선수 모두 2경기 중 한경기는 출장할 수 있는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해태와 빙그레의 대전에서 맞대결이었다.

먼저 등판을 한건 이강철 선수였다. 9월 17일 선발로 나선 것이다. 맞상대는 한희민 선수. 하지만 난조를 보인 이강철 선수는 무려 6점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예상되었다. 그런데 5회초 예상치 못한 선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송진우 선수였다. ‘선발 투수는 무조건 5이닝을 채워야 승리 투수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한다면, 송진우 선수가 승리 투수가 될 판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해태 타이거즈는 패했고, 이강철 선수도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송진우 선수는 승수를 19승으로 바꾸며 다승 단독 1위로 올라섰다. 지금도 이 일을 두고 찬반 양론이 거센 가운데, 당시 여론은 비난이 우세했던 걸로 기억된다.

아무튼 이강철 선수 본인의 심정은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고, 특히 주위 팀 관계자들이 더 분해했다. 그래서 오기를 발동해서 그 다음날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승리의 운명은 이강철 선수에게 미소 짓지 못했다. 승리가 눈 앞에 보인 8회말 5-4로 앞서있는 상황에서 장종훈 선수에게 역전 2점 홈런을 맞고, 승수 대신에 패수만 늘리고 시즌을 마감했다. 자연스럽게 송진우 선수가 다승왕을 차지했고, 25 세이브 포인트(세이브+구원승을 합산한 점수)를 올려, 동시에 차지하기 힘든 부분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아이러니 한건 이런 무모한 대결로 인해, 다음 시즌(1993년) 두 선수 모두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강철 선수는 다음 시즌에 두 자릿수 승수(10승 10패 1세이브)를 기록하긴 하지만, 입단 이후 이어오던 15승 이상 기록을 4년에서 중단해야 했다. 송진우 선수도 타이틀 홀더 답지 않게 7승 7패 8세이브의 부진에 빠졌고, 특히 현재까지 17시즌(올해 제외) 프로 생활 동안 유일하게 100이닝 이하를 던진 시즌으로 기록된다.
당시 이 일에 대해서 절친한 두 선수가 지금은 웃고 이야기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찜찜한 기분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 마지막 만남 - 이제는 선의의 경쟁
이제 이강철 선수는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송진우 선수와는 더 이상 대결을 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두 선수는 10여년전에 정정당당하게 겨루지 못한 승부를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다투는 아름다운 모습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가 두 선수의 라이벌 구도 형성의 최고의 절정기였다.

사실 기록적인 면에서 두 선수의 승부는 이뤄지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이강철 선수는 줄곧 선발투수로 활약했었고, 송진우 선수는 선발보다는 마무리 쪽에서 투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강철 선수의 기록이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00년 을 전후로 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이강철 선수가 1999년 부상으로 그 해 시즌을 통째로 결장한 것이다. 이어 부상 후유증으로 선발진에서 탈락하고, 보직마저 중간 계투로 변경되었다. 반면 송진우 선수는 선발진에 고정이 되면서, 회춘(?)에 가까운 놀라운 피칭을 선보이며 기록 대결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두 선수의 흥미로운 대결이 펼쳐졌던 부문은 다승과 탈삼진이었다. 기록 경신의 기준은 선동렬 선수의 기록(146승, 1,698삼진)이었다. 처음에는 이강철 선수가 근접해 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유로 기록을 추가하지 못하고, 송진우 선수의 추격을 허용했다.

결국, 최다승 부문에서는 송진우 선수가 2002년 4월 23일 두산 베어스와의 청주 경기에서 승리를 기록하며 선동렬 선수의 기록을 먼저 뛰어 넘게 된다. 이강철 선수는 2004년 4월 14일 SK 와이번스와의 인천경기에서 마침내 선배의 기록을 뛰어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은 존경하는 선배의 기록을 먼저 깨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그걸 무척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 아쉬움을 달래줄 기록을 2004년 5월 13일 세우게 된다. 탈삼진 부문에서 송진우 선수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었던 이강철 선수는 이날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강귀태 선수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마침내 존경하는 선배의 기록을 깨는 1,699개를 달성하며, 탈삼진 부문에서 한국 프로야구 1위 선수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5월 21일에는 프로 첫 1,700 탈삼진 고지에도 먼저 올랐다.
그러나 송진우 선수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었던 만큼, 5월 22일 자신이 불펜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송진우 선수는 기아 타이거즈 타자들을 상대로 삼개 3개를 얻어내어 단숨에 1,702 고지를 밟으면서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로써 투수와 관련된 주요 ‘최다’기록(다승, 삼진, 이닝, 타자, 선발 등판)은 모두 송진우 선수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두 선수의 경쟁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젊은 투수 못지않은 몸 관리와 마운드에서의 성실성으로 서로가 최고의 기록을 달성할 수 있도록, 최고의 선의의 경쟁자로서 서로를 이끄는 모습으로 우리 팬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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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짜’가 선정하는 이강철 선수의 최고 경기
1996년 10월 22일 해태 타이거즈 vs 현대 유니콘스 한국시리즈 5차전 잠실 경기
: 3-1 해태 타이거즈 승리, 이강철 선수 세이브

1996년 시즌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는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투타의 핵심 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선동렬 선수가 1995년 시즌을 마치고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을 했고, 김성한 선수는 1995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에 팀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던 두 선수를 잃고 나자 많은 전문가들은 이제 종이 호랑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급기야 꼴찌 후보로까지 전망했다. 그 예상은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현실화가 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팀 내에서 코치진과 선수단사이에 항명사태로 이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이제 해태 타이거즈는 ‘끝난게 아니냐?’라는 전문가들의 설득력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즌이 거듭되자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섭게 뭉쳐서 승리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고, 신생팀 현대 유니콘스와 한국 시리즈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시리즈는 이강철 선수를 위한 무대였다. 3차전과 6차전 선발승을 거두며 2승 1세이브의 기록으로 팀이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최우수 선수로까지 선정되었다. 한편, 3차전 완봉승을 이끌어낸 호투는 한국 시리즈 사상 5번째 대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차전 경기를 최고의 경기로 꼽는 이유는, 이 경기가 한국 시리즈 패권을 다투는데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었고, 그 역할을 이강철 선수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양 팀은 광주와 인천에서 각각 1승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2승 2패로 호각세를 보였다. 특히, 3차전에서 이강철 선수가 완봉승을 거두자, 현대 유니콘스는 4차전 경기에서 정명원 선수를 앞세워 한국 시리즈 사상 첫 노히트노런 경기를 이끌어 냈다. 이렇게 양팀의 분위기는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차전 경기가 잠실에서 야간 경기로 펼쳐졌다. 해태는 선발 조계현 선수의 호투와 현대 타자들의 집중력 부족으로 8회말까지 3-1로 앞서나갔다. 승부가 거의 기울어져 가던 그때 현대가 마지막 찬스를 잡았다. 9회초 2사 주자 2, 3루를 만든 것이다. 안타 한방이면 동점이 되는 상황이었다. 타석에는 신인 박진만 선수가 들어섰고, 이때 해태 타이거즈는 마무리 투수 김정수 선수를 마운드에서 내리고, 선발 투수인 이강철 선수를 전격 투입한다. 김응룡 감독으로서는 이 대목이 승부처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재박 감독도 박진만 선수 대신에, 좌타자 이희성 선수를 대타로 내보냈다. 하지만,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던 이강철 선수는 이희성 선수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고, 시리즈 전적에서 우위를 보인 해태 타이거즈는 다음날 이강철 선수를 다시 선발 투수로 등판시켜 승리를 따내며, 4승 2패로 통산 8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Posted by 공짜